명자꽃의 계절에
토요일에 비가 하루 종일 왔기 때문에
일요일, 오바 앞에 모여 어디로 갈까 하다가
봄꽃이 보고 싶다고
절물오름 옆 봉개 민오름으로 향했다.
조금 쌀쌀한 날씨였지만
오름을 한 바퀴 돌고는
오름 자락으로 나와
봄꽃들을 보았다.
햇볕이 늦었기 때문에
그제서야 복수초가 벙글기 시작하고,
오래 전에 핀 변산바람꽃은
여기저기서 기운을 못 차리고 있다.
시내에서 뒤늦은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골목길에서
이렇게 피어 있는 명자꽃을 발견하고
울타리 너머로 당겨 찍다.
♧ 명자꽃 - 목필균
붉은 립스틱 벅벅 그어대며
그사람 근무하는 사무실 창에
사랑을 고백했다는
전설 속의 그녀
뜨거운 사랑의 몸짓
한 길로만 흐르는 아픔일까
겨우내 칭칭 동여매었던
가슴앓이 신음소리
딱딱하게 굳어진 가지에도
붉은 핏물이 방울방울 내비쳤다
길어진 햇살
남향 창가에 서 있는
명자가
전설의 그녀가
한 몸으로 불타고 있다
♧ 명자꽃 - 이희숙2
명자라는 너무 흔하고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그녀의 고향은 중국이라고 했다. 어쩌다 알게 된 그녀는 오다가다 만난 사람 중 한사람일 뿐인데 머나먼 이국 땅에서의 생활이 외로웠던지 묻지도 않았는데 고향에서는 그녀를 보춘화라 불렀다는 이야기까지 했다. 키는 작지만 화사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볼수록 신비한 매력이 숨겨진 묘한 여자였다. 불안할 만큼 투명한 그녀의 붉은 얼굴 때문만도 아닌데 평범 속에 숨겨진 조숙함 때문만도 아닌데 촌스런 이름 때문에 첫 만남에서 나를 웃게 했던 그녀는 이상하게 나의 봄을 어지럽히고 있다.
동네 어른들은 그녀와 어울려 다니면 봄바람 난다고 그녀와 말 섞는 내게 눈총을 주지만 볼수록 은은하고 청초한 느낌을 주는 매혹적인 그녀를 모른 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도 표독스런 가시가 있다는 걸 안 건 봄바람이 성가시게 불어대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말하며 선홍색 입술을 깨무는 그녀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그 때 처음 알았다. 어떤 이유로든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가시가 있다는 것을, 그 가시가 있어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도도함까지 갖춘다는 것을.
흔한 이름 때문인지 못 본 동안 잊고 있었던 그녀가 한 장의 엽서처럼 불쑥 가슴에 날아든 건 그녀를 못 본지 달포쯤 지난 어느 날 오후였다. 사랑만 하고 살겠다던 그녀가 한 번 본 남자를 따라 서울로 시집갔다는 소식은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녀와 내가 무슨 로맨스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터질 듯 터질 듯 피어나던 그녀의 미소가, 물먹은 볼처럼 통통한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 그만 나도 몰래 선홍색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찬란한 나의 봄은 그렇게 그녀로부터 왔다 지고 있었다.
♧ 명자꽃 - 김승기
캠퍼스에 내려앉는 햇살
만지고 있는
새내기 여대생
처음 접해본 동아리 모임
초경 치르던 밤이 생각나는지
발그랗게 달아오른 얼굴
이렇게도 다른 세상이었던가
기다려지는 엠티 대학축제
초등학교 때 소풍전날 밤처럼
봉긋 솟아오르는 젖가슴
울렁울렁
토해내는 어지럼증
이제 리포트는 어떻게 쓸까
겨울처럼 보낸
여고시절 떠올릴 때마다
하혈로 찾아오는
생리통
지금은 봄이다
♧ 봄 창가에서 - 송정숙(宋淑)
날지 못하고 내 안에 있는 봄
작은 숨소리 파닥이며
오늘도 살아 있음을 알리고
봄 소리커지고 꽃향기 짙어질수록
숨어드는 소리
우유를 마시며 햇살 한 줌 넣어준다
고등어 사라고 외쳐대는 여인
가을 열매보다 더 붉은 새소리
분주히 몸단장하는 호수공원 학
멀리서 명자꽃망울 소리 들린다
모두 새롭게 태어나는 봄
작년 봄을 이제 보내주자
이 봄을 위하여서
♧ 사랑하는 명자씨 - 공석진
명자씨
사랑하는 명자씨
사랑을 위하여 꽃 피우지 마세요
상처받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닐진대
꽃이 지고난 후
이파리 바람에 날아가 기억이 희미해지면
그저 눈물만 가득 뿌리며
맨바닥에 뒹굴면 어쩌시려구요
명자씨
서러운 명자씨
다가올 사람 유혹하지 마세요
떠나간 사람 그리워하지 마세요
당신의 선홍빛 자태는 눈부시나
새벽녘 감춰진 이슬의 영롱함은
세상 사람들의 이기심에
보이지 않으니까요
굳이 본능으로
애써 꽃 피우려거든
뭇 남정네들에게 보이지않는
먼지 가득 머금은 길목련으로
거친 산등성 후미진 곳에 자리하세요
혹여
산심(山心)캐는 심마니처럼
당신의 겸손함을 사랑하여
평생 맺어질 가인(佳人)으로
다가설 지도 모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