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배꽃 핀 줄도 모르고

김창집 2014. 3. 31. 07:13

 

지난 토요일, 오름에 다녀오는 도중

학생문화원 옆을 지나는데

멀리서 배나무가 환한 것이

얼핏 눈가를 스쳤다.

 

조금 지난 길에서

마침 차가 신호등에 멎기에

내려달라고 해서 얼른

찾아가 보았다.

 

그 결과 두 그루의 배나무에는

새하얀 배꽃이 환하게 피어 있다.

벚꽃 잔치를 일주일 미뤄버려

만개가 미안한 가운데,

봄에 피는 꽃은 몽땅 피어난 것이다.

 

 

♧ 배꽃 핀 달밤(259) - 손정모

 

십리 들녘

은은히 적시는 향기

과수원 가득

물결처럼 소용돌이치는데

 

가만히 있으려도

형언 못할 그리움

어깨선에서부터

포근히 밀려드는 달밤

 

청량한 솔바람에

벙긋거리는 수만의 꽃송이들

구름송이처럼 피어올라

까르르 웃음을 깨문다.

 

옷깃으로 휘감기는 꽃물결에

눈물 비친 나그네

잠자코

꽃송이에 얼굴을 묻어본다.  

 

 

 

♧ 배꽃 화르르 지고 - 김정란

 

그 언덕을 넘어가

당신을 거기서 보리라는 확신

애초부터 내게는 없어

 

내 가슴은 너무 가벼워서

벌써 산 사람의 것이 아냐

 

다만 살고 있기는 해

최소한의 물량 어쨌든 확보된 존재의 자리

방금이라도 꺼질 것처럼 위태하게 흔들리지만

어쨌든, 아직은 안전해, 대체로

 

그 언덕을 넘어가

거기 모든 것 공중에 떠 있고

배꽃 화르르 지지

 

stop.거기서.끝.이.야.더.이.상.못.가.

 

언제까지나 흩날리는 꽃잎들

공.중.에.서.의.유.예.

 

꽃잎들 꽃잎들 아픔 아주 가까이 스치고 지나가는 여리디여린 향기

 

당신은...... 오지 않아

다만, 내가 여기까지 온 것뿐이야 

 

 

♧ 배꽃 - 이영균

 

얼마나 그리우면

이 한밤 하얗게 달빛을 붙잡을까?

 

설레는 가슴엔 심지 하나 꽂아

오늘밤 환하게 길 밝혀 들고

오래전 떠나간 달빛 그길로

가쁜 숨 내닫는 한달음 설레임이 인다.

 

고운 빛 아련한 얼굴

해마다 오월엔 기다림이 이러할까?

 

올해도 님 오시는 발소리

달빛 은은한 밤

꽃잎, 보고픈 님의 모습 되어

가슴엔 온통 피고 또 핀다.  

 

 

♧ 배꽃이 피면 - 마종하

 

배꽃이 피면 내님은 돌아올까

은의 월쓰 반짝이는 달빛 속에

그대의 웃는 이빨 차고 시려서

배꽃이 피면 강물도 푸르러

불 밝힌 열차가 서럽게 떠나는 밤

저녁 잠결에서 깨어나 앉으면

창밖엔 어느새 희게 웃는 바람소리

빗발은 밝게 꽃잎에 부서지고

멀리서는 떠난 밤차의 긴긴 울음소리

배꽃이 피면 끊어질 듯 서러워

달빛은 흘러내린 산모래를 적시고

그대의 물빛 크림 상기도 싱그러워

그대의 밝은 손은 내 가슴에 어른거려

오 코를 묻네 눈을 감네 향기로 뜨네.  

 

 

 

♧ 배꽃 - 하두자

 

바다 가득 밀려오는

산호초 붉은 바람에

온 몸의 피돌기 돌아 연초록 잎이 돋는다

순간의 빛살과 그림자 한 몸이 되어

바람끝 따라 한 시절 터지고 싶은 욕망

내 안에 쌓인 순백의 향내

그 열망에 나는 떨고 있다

빗장 굳게 닫은 창문들 열어제끼고

방을 뛰쳐나간 꽃망울들이

하얗게 하얗게 폭죽 터뜨리며 무너진다

세상이 흔들릴 적마다

나는 황홀하다  

 

 

♧ 배꽃 날리는 날 - 김정호

 

시방 온 시상*이 난리제

왜 그렇게 천지가

바람난 옆집 여편네 속살처럼 희다냐

희다 못해 실핏줄이 다 보인다냐

아니여! 저건, 필경

철쭉이 온산에 불타 오르도록

쑥떡 하나 먹지 못하고

힘든 보리 고개를 넘겨 그런거여

그래, 푸른 보리 이파리만 보아도

가슴이 벌렁거리고

꽃잎 오사게* 피었다가

비가 내리면 힘없이 지는거여

내 가슴

새까맣게 타는 줄 모르고

 

봄비에 배꽃 하염없이 지는 날

오일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혼자 말처럼 내뱉는 울 엄니가

참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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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상 : “세상”의 전라도 사투리

* 오사게 : “아주 많다”의 전라도 사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