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탱자꽃 핀 언덕

김창집 2014. 4. 7. 00:12

 

일요일, 해안동 가족묘지에

묘제 보고 오는 길목

목장 안길 울타리에

하얗게 탱자꽃이 피어있었다.

 

토요일엔 모라이악에 가서

고사리 한 줌 꺾어다

반찬을 해 먹었는데,

 

오늘 나들이엔

벚꽃을 비롯해, 유채꽃, 배꽃, 꽃사과

갯무, 장딸기, 줄딸기 등등,

봄에 피는 꽃들이 줄줄이 피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얼마 없어

더워질 것 같다. 

 

 

♧ 그대 생각 1 - 김용택

 

하얀 탱자꽃 꽃잎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장입니다.

 

푸른 보리밭에 아침 이슬 반짝입니다. 밭 언덕에 물싸리꽃은

오래된 무명 적삼처럼 하얗게 피었습니다. 세상을 한참이나 벗어 나온

내 빈 마음 가장자리 부근에 꿈같이 환한 산벚꽃 한 그루 서늘합니다.

산이랑 마주 앉을까요. 돌아서서 물을 볼까요.

 

꽃 핍니다.

배꽃 핍니다.

우리집 뒤안에 초록 잎 속에 모과꽃 핍니다

민들레 박조갈래 걸럭지나물 시루나물 꽃 봄맞이꽃 꽃다지도 핍니다

저 건너 산 끄트머리 돌아서는 곳 아침 햇살 돌아오는 논두렁에

느닷없이 산복숭아 한 그루 올해 연분홍으로 첫 꽃입니다.

저 작은 몸으로 꽃을 저렇게나 환하게 피워내다니요.

눈을 감아도 따라옵니다.

 

꽃입니다 꽃이요 꽃, 만발한 꽃밭입니다.

꽃 피면 꽃 따라 다니며 어쩔 줄 모르던 나이 지나,

꽃나무 아래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피는 꽃도 지는 꽃도 한참씩 건너다봅니다.

 

꽃이야 지겠지요 꽃이야 지겠지요

저기 저 하얀 탱자꽃 꽃잎 다섯 장이 다 진다구요.

 

그대도 없이 나 혼자 허리 굽혀 탱자꽃을 줍습니다  

 

 

♧ 탱자꽃을 보다 - 김승해

 

삼동 바람 끝에 날만 세우던

탱자나무 묵은 울타리에 꽃핀다

맨 팔뚝에 소름 돋듯

탱자꽃 피면

일찍 늙은 몸에

새로 애 밴 일처럼 남사스러워

산기 도는 울타리

봄젖내가 흥건하다

 

꽃 피는 일이 살아서 다치는 일인 줄 알았을까

상처마다 가시 돋는 일인 줄 알았을까

도끼로 나비 잡듯 막무가내 봄빛 아래

고요에 닿는 막다른 길을 밟고

상처마다 탱자꽃 희게 핀다

 

바짝 세운 가시에도

꽃잎 한 장 안 다치는 봄,

탱자꽃 피면

누구의 기억인지 알 수 없는

한 과거가 벌떡 일어서

미처 못 떨군 뒤통수 동그란 열매 하나

문둥이 문드러진 얼굴같이 웃는다

  

 

♧ 탱자꽃 - 권태원

 

말은 이미

필요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은 사랑은

기도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탱자꽃 달빛처럼 스러지는 지금

나는 이미 당신의 것입니다

 

문 닫아도 어느새 와 있고

길을 막아도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겠습니다

내 삶의 전부를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 사기리 탱자나무 - 김종제

 

목울대에 걸린

가시 같은 시절이 한 때 있었다

아니 오히려 억센 가시가 되어

제몸을 제가 스스로 찌르며

서슬 퍼렇게 밀려오는 저 폭풍 같은 세월을

눈 부릅뜨고 막아 보려고 했던

시절이 가까이 있었다

아, 강화도 함허동천 가는

한적한 길 화도면 사기리 길목

수백 년 지키고 선 탱자나무 한 그루

때때로 새들과 나비 날아와

제몸 지키기 가장 좋아서

야단스럽게 나무속으로 모여들면

외적에 맞서 성벽 아래 울타리 되어

죽음에 맞서 안간힘을 쓰는 듯한 표정으로

길고 험상궃게 생긴 손가락 내밀고

피 흘리며 소리치다 쓰러지던

슬픈 역할을 맡은

그런 가시 많은 나무가 있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게

목숨의 끝까지 깊숙하게 박혀 있어

숨쉴 때마다 아프게 하늘을 찔러대는

사기리 탱자나무가 운다 혼백이 운다

세상에 얼마나 속이 탔으면

먹을 수도 없는 시디신 열매를 매달았을까

제 몸이 스스로 가시가 되어

고운 향기 다 드러냈으니

겨드랑이 돋아나는

여린 꽃잎마저 이제 울음이 되는구나

흰눈을 뒤집어 쓴 탱자나무가

백의(白衣)처럼 눈부시다  

 

 

 

♧ 탱자꽃 - 안도현

 

탱자 울타리 탱자꽃 되려고

올망졸망 입 다문 흰 꽃망울들 보니

앞가슴 볼록해진 뒤로 나하고 목욕 절대 안 하는

유경이 생각난다  

 

 

♧ 탱자꽃 - 주근옥

 

허물 벗는 햇살

앞자락에 묻히네

 

꽃그늘 밀고 가는 여울물소리

시새움 캐어내는 새소리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권태의 사향처럼

 

나비 등에 실려 온 지평선

탱자꽃 속으로 몰려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