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자꽃 핀 언덕
일요일, 해안동 가족묘지에
묘제 보고 오는 길목
목장 안길 울타리에
하얗게 탱자꽃이 피어있었다.
토요일엔 모라이악에 가서
고사리 한 줌 꺾어다
반찬을 해 먹었는데,
오늘 나들이엔
벚꽃을 비롯해, 유채꽃, 배꽃, 꽃사과
갯무, 장딸기, 줄딸기 등등,
봄에 피는 꽃들이 줄줄이 피었다.
이렇게 하다가는 얼마 없어
더워질 것 같다.
♧ 그대 생각 1 - 김용택
하얀 탱자꽃 꽃잎은 하나 둘 셋 넷 다섯 장입니다.
푸른 보리밭에 아침 이슬 반짝입니다. 밭 언덕에 물싸리꽃은
오래된 무명 적삼처럼 하얗게 피었습니다. 세상을 한참이나 벗어 나온
내 빈 마음 가장자리 부근에 꿈같이 환한 산벚꽃 한 그루 서늘합니다.
산이랑 마주 앉을까요. 돌아서서 물을 볼까요.
꽃 핍니다.
배꽃 핍니다.
우리집 뒤안에 초록 잎 속에 모과꽃 핍니다
민들레 박조갈래 걸럭지나물 시루나물 꽃 봄맞이꽃 꽃다지도 핍니다
저 건너 산 끄트머리 돌아서는 곳 아침 햇살 돌아오는 논두렁에
느닷없이 산복숭아 한 그루 올해 연분홍으로 첫 꽃입니다.
저 작은 몸으로 꽃을 저렇게나 환하게 피워내다니요.
눈을 감아도 따라옵니다.
꽃입니다 꽃이요 꽃, 만발한 꽃밭입니다.
꽃 피면 꽃 따라 다니며 어쩔 줄 모르던 나이 지나,
꽃나무 아래에 들어가 가만히 앉아 피는 꽃도 지는 꽃도 한참씩 건너다봅니다.
꽃이야 지겠지요 꽃이야 지겠지요
저기 저 하얀 탱자꽃 꽃잎 다섯 장이 다 진다구요.
그대도 없이 나 혼자 허리 굽혀 탱자꽃을 줍습니다
♧ 탱자꽃을 보다 - 김승해
삼동 바람 끝에 날만 세우던
탱자나무 묵은 울타리에 꽃핀다
맨 팔뚝에 소름 돋듯
탱자꽃 피면
일찍 늙은 몸에
새로 애 밴 일처럼 남사스러워
산기 도는 울타리
봄젖내가 흥건하다
꽃 피는 일이 살아서 다치는 일인 줄 알았을까
상처마다 가시 돋는 일인 줄 알았을까
도끼로 나비 잡듯 막무가내 봄빛 아래
고요에 닿는 막다른 길을 밟고
상처마다 탱자꽃 희게 핀다
바짝 세운 가시에도
꽃잎 한 장 안 다치는 봄,
탱자꽃 피면
누구의 기억인지 알 수 없는
한 과거가 벌떡 일어서
미처 못 떨군 뒤통수 동그란 열매 하나
문둥이 문드러진 얼굴같이 웃는다
♧ 탱자꽃 - 권태원
말은 이미
필요하지 않습니다
상처받은 사랑은
기도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탱자꽃 달빛처럼 스러지는 지금
나는 이미 당신의 것입니다
문 닫아도 어느새 와 있고
길을 막아도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당신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겠습니다
내 삶의 전부를 당신에게 바치겠습니다
♧ 사기리 탱자나무 - 김종제
목울대에 걸린
가시 같은 시절이 한 때 있었다
아니 오히려 억센 가시가 되어
제몸을 제가 스스로 찌르며
서슬 퍼렇게 밀려오는 저 폭풍 같은 세월을
눈 부릅뜨고 막아 보려고 했던
시절이 가까이 있었다
아, 강화도 함허동천 가는
한적한 길 화도면 사기리 길목
수백 년 지키고 선 탱자나무 한 그루
때때로 새들과 나비 날아와
제몸 지키기 가장 좋아서
야단스럽게 나무속으로 모여들면
외적에 맞서 성벽 아래 울타리 되어
죽음에 맞서 안간힘을 쓰는 듯한 표정으로
길고 험상궃게 생긴 손가락 내밀고
피 흘리며 소리치다 쓰러지던
슬픈 역할을 맡은
그런 가시 많은 나무가 있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게
목숨의 끝까지 깊숙하게 박혀 있어
숨쉴 때마다 아프게 하늘을 찔러대는
사기리 탱자나무가 운다 혼백이 운다
세상에 얼마나 속이 탔으면
먹을 수도 없는 시디신 열매를 매달았을까
제 몸이 스스로 가시가 되어
고운 향기 다 드러냈으니
겨드랑이 돋아나는
여린 꽃잎마저 이제 울음이 되는구나
흰눈을 뒤집어 쓴 탱자나무가
백의(白衣)처럼 눈부시다
♧ 탱자꽃 - 안도현
탱자 울타리 탱자꽃 되려고
올망졸망 입 다문 흰 꽃망울들 보니
앞가슴 볼록해진 뒤로 나하고 목욕 절대 안 하는
유경이 생각난다
♧ 탱자꽃 - 주근옥
허물 벗는 햇살
앞자락에 묻히네
꽃그늘 밀고 가는 여울물소리
시새움 캐어내는 새소리
그 틈으로 새어 나오는
권태의 사향처럼
나비 등에 실려 온 지평선
탱자꽃 속으로 몰려 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