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성대림 시집 ‘폐동이왓’과 참꽃

김창집 2014. 5. 5. 08:01

 

성대림 시집 ‘폐동이왓’을 보내왔다.

제주시 이호동 출신으로

서귀포 대림의원 원장인 시인은

현대문예 제주회원, 귤림문학회원,

제주문인협회 회원이다.

 

필자는 ‘작가의 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세상을 향한 자신만의 몸집이면서

지난날에 갇혀 있던 내 분신들을 하나씩 깨워

내게로 데려오는 작업이었다.’라고 적었다.

 

첫시집 발간을 축하하며

그 중 몇 편을 골라

요즘 한창 피어나는 참꽃과 함께 올린다. 

 

 

♧ 폐동廢洞이왓

 

소나무, 윤노리나무,

순비기나무, 사스레피나무,

잡목이 우거진

유년시절 총빵놀이*터

 

척박한 섬을 버리고

그녀는 큰 섬을 찾아 떠났지만

땅울림이 심하여서

그 곳 또한 편안치 못하였다

 

이제 벗도 없고

산천마저도 낯설어져

돌아오지 못할 신세가 되어버리고

그리워하는 두 섬처럼

오늘도 서로 바라보며 떠있다

 

모래 바람 불어 덮쳐

마을은 실종되고 밭으로 바뀌었다

누군가 소나무를 심었고,

세월은 구름처럼 흘러

밭은 숲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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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빵놀이 : 손가락으로 겨냥하고 입으로 총소리를 발사하며 노는 아이들의 서바이벌 게임의 일종

  

 

♧ 알러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지독한 그리움

 

아무리 긴장에도

피할 수 없는

도발적인 전율

 

잊어야만 없어질

만날수록 악화되는,

어쩌면

죽어야 나을 고질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 나였을까? 

 

 

♧ 휴식

 

때 이른 친구의 죽음에

놀람도 잠시

일폿날 동창들은

그 많은 소주 돼지고기며 국수를

양껏 먹어치우고

친구가 좋아하던 윷놀이도

밤늦도록 놀다가 갔다

 

다음날 아침 일찍이

먼 나무에 열린 빨간 조등들을

양쪽으로 도열시켜 환송하고

노랗게 익은 감귤 밭을 지나

색 바랜 억새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벌판을 뒤로 하여

차가운 안식처 향해서

씩씩하게 출발하였다

 

하관에 맞추어

가족과의 인사를 처절하게 마치고

지상과의 모든 인연 접고서

평생 못 누려보았을

편안한 휴식에 들어갔다

 

 

♧ 귀가

 

급작스레 세상에서 퇴출당한

서른다섯의 조카며느리

폭발 직전의 지뢰처럼

부풀려져 있다가 터져버린 뇌혈관

커다란 풍선이 함몰하는 소리에

놀라고 상심하는 일가친지들

 

이미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훤칠한 내 또래의 사촌 형

허리 품이 한 치나 더 넉넉해진

시집가서 잘 살고 있다는 친척 누이

어느덧 노을빛으로 물든

내 코흘리개 적에 시집온 숙모님

장례식장에서 마주친 얼굴 모두

상심한 고추 빛이다

 

저무는 차창 너머로

흔들리는 신호등과 안내판을

좇아가는 귀갓길 버스 행로같이

흘러만 가는 각자의 삶의 궤적들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지만

오늘만큼은 내 동굴 속에

꼭꼭 숨어 있고 싶다

 

버스 종점에서

살아 있다는 기념으로 챙겨든

세제 한 봉지

내일은 때에 찌든 옷가지며

상념에 혼탁해진 머릿속마저도

다시금 말끔히 씻어내야겠다 

 

 

♧ 말言

 

책상 정리, 손톱 정리라고 할 때는

두렵기는커녕

개운하고 착한 의미였지만

인간 정리라고 바뀌면

이 말이 얼마나 잔인한지

비로소 실감한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정리를 해야 하고

또 정리 당하면서 살아가게 될까

나도 마음 아프고

남 또한 얼마만큼 슬프게 할까

 

시간이 마저 흐르고 나면

세월조차도 이 세상에서

정리되어야 할 대상이겠지

그 때는

어떤 슬픔이나 고통도 없을 것이고

마음마저 편안해지지 않을까

 

정리하고 난

손톱과 책상처럼  

 

 

 이호 바다

 

한 겨울

멀지 않은 그 곳 백사장이

한사코 찾아가고 싶어졌다

넓고 크게만 여겼던 그 세상

요술처럼 줄어들어

아담하게 펼쳐져 있었다

 

모래벌판 놀이터 삼아

새까만 얼굴의 여름아이

고무신 까뒤집어 만든

검정색 자동차로

친구와 애써 만든 모래성

간단히 부숴버리고는

바닷가서 갓 잡은 조개와 성게

간식삼아 먹는다

 

순비기나무

보라색 꽃향기가 자극적이던

배후의 폐동이왓*에서

서바이벌 게임 함께 하던 동무들

이제는

하나 둘씩 서둘러 떠나간다

 

돌배나무 한 그루

백사장을 가르는 대물깍**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고

그물 던져 숭어 잡던 사람들

어디론가 가버리고

반짝이는 빈 물결만이

저녁 햇살 받들고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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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동이왓 : 제주시 이호동 소재, 소나무 숲 이름.

**대물깍 : ‘대물’은 시냇물 이름, ‘깍’은 제주어로 시냇물이

              바다와 만나는 부분으로 소(沼)처럼 넓게 형성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