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김순선 시집 ‘저, 빗소리에’와 철쭉꽃

김창집 2014. 5. 17. 18:38

 

김순선 제2시집

‘저, 빗소리에’가 나왔다.

 

김순선 시인은

2006년 ‘제주작가’와 ‘현대문예’로 등단해

첫 시집 ‘위태로운 잠’을 냈으며,

제주작가회의 회원이다.

 

시집에서 시 몇 편을 골라

지난 5월 10일부터

4박5일간 지리산을 헤매다 찍은

철쭉꽃과 함께 올린다.  

 

 

♧ 시인의 말

 

벚나무 가로수가 많은 동네로 이사오고

네 번째 벚꽃이 피고 있습니다

오래 견디고

거침없이 약동하는 봄의 서정에 깃들어

두 번째 허물을 벗습니다

 

2014년 봄 

 

 

♧ 감물 들이며

 

머뭇거리는 여름에

작대기를 하나 세워 놓고

 

지나간 세월을 갈아

주물럭

주물럭

 

녹색감물에 노을을 풀어

활활 타오르는

단풍빛으로

 

다시 태어나기를

꿈꾸고 싶어라 

 

 

♧ 때죽나무 종 되어

 

사려니 숲 황톳길에

때죽나무 가지마다 꽃향기 만발해

숲을 적시네

 

사려니 숲 황톳길에

간밤에 내려온 하얀 별무리들

눈이 부셔 차마 밟지 못하네

 

나, 때죽나무 은은한 종이 되어

진동하는 여름을 살겠네

꿀벌의 주파수 붕붕거리며

사려니, 사려니, 살겠네 

 

 

♧ 월대천의 봄

 

외도 바람은 가시가 없다

 

아라동의 눈도

신제주의 쌀쌀한 바람도

월대천 밑으로 숨어 버린다

 

동장군 같은 운동기구와

그림자 하나 없던 산책로에도

노송의 향기가 번져

밖으로 아이들을 부르고 있다

 

바다와 민물이 합방하여

햇살에 몸 비비며

월대천 은어의 지느러미가

반짝이고 있다

 

 

♧ 풍경

 

봄비가 지나간 한두기 바다는

모래밭에 장서를 썼다 지운다

 

낮은 하늘은

생크림 같은 구름

한입 베어 먹으라고 넌지시 내밀고

 

등대 끝 삼발이에 앉아있는 갈매기는

한 폭의 수묵화를 감상하듯

사라봉 팔각정에 시선이 멈추었다

 

오수에 잠긴 듯 조용한 바다

까치발로 다가와서 소리 없이 흔들릴 때

나도 풍경이 되어

흔들리는가 

 

 

♧ 저, 빗소리에

 

만약,

꽃이 한 번 피고 영영 질 줄 모른다면

그때도 아름답게 보일까

 

길가나 로터리에 잘 가꾸어 놓은 꽃도

때론,

제복을 입은 마네킹 같이

성형 가면을 쓴 웃음이

낯설 때도 있는데

 

오늘따라

오름 어느 자락에 없는 듯 피어 있던

작은 들꽃 한 송이

자꾸 눈에 아른거린다

 

다듬지 않아서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어서

더 그립고 애틋한

가슴을 두드리는

저, 빗소리에

어딘가에서는 꽃 한 송이 피어나고

어깨를 들썩이는 울음 같은

저, 빗소리에

어딘가에서는 꽃 한 송이 지고 있겠지

 

꽃은 질 때 더 아름다워야 하리

황홀한 사랑도 저물 때가 있듯이

누군가의 가슴에

더 애틋한 그리움으로

고여 오듯이 

 

 

♧ 백조일손

 

슬퍼하지 마라

우린 처음부터 하나였느니라

나, 너가 아니라

한 민족, 한 형제였느니라

 

콩 한쪽도 나누어 먹었듯이

우린 이미 살도 피도 뒤엉키며

마음도 꿈도 하나인지 오래느니라

 

돌담 위로 식게* 떡 나누어 먹었듯이

육십 평생 어둠 속에서

서로 부등켜안고

우린 이미 하나가 되었느니라

 

지금은 간새 따라 올레길 걸어가듯

서로 용서하며

모두 함께 걸어가야 할 길

 

슬퍼하지 마라

우린 처음부터 하나였느니라

길 위에

찔레꽃 향기 그윽한

마음의 길 만들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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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게 : 제주어로 ‘제사’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