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 봄호의 시조
* 윤노리나무
‘제주작가’ 봄호(통권44호)에는
모두 아홉 시조시인의 작품이 실렸다.
아침에 하나하나 읽어보다
그 중 한편씩 여기 옮겨
어제 찍은 들꽃과 함께 올린다.
* 금새우란
♧ 숲에서 - 오영호
태풍 몰아쳐도 숲은 침묵한다
순응하는 자존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땅속의 깊은 사유의 우물
퍼올리기 때문이다.
* 미나리아재비
♧ 짧은 시조 아홉 - 고정국
1. 시시한 시
시시한 세상바닥에 시시하게 내리는 눈
시시한 시 쓰기 위해 시시하게 사는 요즘
갈지(之)자 시조 한 줄이 취중방뇨 중이다.
2. 종말처리장에서
내가 싼 배설물이 여기 섞여 있을 거다
썩어 문드러져, 또 썩어 문드러진
그 곳에 똥 냄새 나는 시 한 수를 건졌다.
3. 매화 무렵
어떤 개잡놈이 가슴으로 시 쓴다기에
젖꼭지에 먹물 바르며 시 한 편 써낸 아침
홍매화 가지 끝에도 피가 맺혀 있었다.
4. 개들에게 미안해
많이 가진 자를 부자라고 생각했네
많이 배운 자를 식자라고 생각했네
조아려 꼬리치는 게 개인 줄만 알았네.(하략)
* 씀바귀
♧ 쉰다리*
누구의 밥이 되어
부글부글 괸 적 있다면
버려지는 것들의 삭히는 법을 알지
앙금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야 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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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다리 : 쉰밥을 발효시켜 만든 제주의 향토 음료
* 떡윤노리나무
♧ 산수유꽃 피는 마을 - 한희정
한세상 꾸역꾸역
비탈만 보고 살아,
시장끼 오르막도
발걸음 가벼운 날
약불 켠 반곡마을이
노릇노릇 익고 있네
오랜 삶 헐거워도
고슬고슬 소반 한 상
한술 두술 건네는 손에
촌로의 정은 깊어
렌즈 속 화엄의 바다
눈부처로 답하네
* 고추나무
♧ 망장포* - 김영숙
겨울무청빛이다 설밑 망장포는
옥돔 주낙 나간 남편 서른 해를 기다려
망장포 선인장이 된 사촌 형님 눈빛도
파도가 깎아 먹어 개맡*은 생겼다지만
여인의 파인 볼은 누가 깎아 먹었을까
볼우물 귀엽던 뺨에 피자두색 노을 고여
망쟁이, 너는 알지, 속 시원히 말해봐
든 줄도 몰랐었다는 뱃속의 쌍둥이 녀석
아버지 바다를 본다 제삿날 포구에 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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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장포: 예전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 이곳에서 왜구의 동태를 살펴 봉화를 올리는 등 방어시설이 있었던 데서 「망장포」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망장포를 망쟁이라고도 부른다.
*개맡: 마을의 포구를 이르는 말이다.
* 바위수국
♧ 고독 - 홍경희
참 길고
고단한 꿈
사막을 여태 걷나
새벽에 받은 문자
앙상한 !뿐
별빛도
헤진 길 위에
눈물 한 줄 흘렀나
* 산딸나무
♧ 엉또폭포 - 김진숙
오래도록 참았네
멈추어 선 저 울음
말을 아끼던 어머니
타들어간 속내인 양
흐리고 쓰린 날에도
쏟아내지 못하네.
숨어서 동백이 지는
절벽에 기대어서
엉엉 또 울어야
펑펑 다 쏟아내야
그 겨울 견딜 것 같은
막내딸을 보았네.
* 때죽나무
♧ 고사리 장마 - 김영란
해마다 사월이면
마른 젖 탱탱 불어
까맣게 잊은 듯이
가슴에 품은 아이
조막손 제주고사리
젖 달라고 보챕니다
* 덜꿩나무
♧ 남수각 소묘 3 - 김연미
냉동 꽃게 손질하는 그 여자 눈매가 곱다
바다를 건너온 사람 바다 앞에 다시 앉아
심연의 꿈을 다듬어 햇살 아래 펼치는
저 작은 꽃들의 미소 낮은 곳에 내려 앉아
입과 귀 다 막고도 박자 맞추며 뛰는 심장
다문화 뒤섞인 삶도 푸른 손을 내밀고
흘러흘러 들어와 섬을 이루고 사는 것이
남수각 아래에 사는 들풀만은 아니구나
귀에 선 사투리 말투 꽃이 피고 있었다.
* 찔레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