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5월호와 ‘금낭화’

김창집 2014. 5. 20. 14:19

 

오늘은 모처럼 비가 와서

잠시 집에 머물게 되어

‘우리詩’ 5월호를 뒤적여 보다

시 몇 편을 옮겨

지리산에서 찍은 금낭화와 같이

올려 본다. 

 

 

♧ 린우드(Lynwood)*의 벚꽃 - 김영호

 

린우드의 가로수길

벚꽃들이 활짝 피었네.

 

하얀꽃 이파리 고향누이의 얼굴

샘이 난 보슬비 누이의 화장을

자꾸만 자꾸만 지우려 하네.

 

말없이 바라보는 실향(失鄕)의 동족들

이마 주름 속에 벚꽃이 피어나네.

 

한복(韓服)입은 조선의 누이들

활짝 꽃핀

린우드의 가로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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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우드: 시애틀 북쪽의 한인 밀집지역.  

 

 

♧ 감자별 - 도경희

 

씨감자를 놓으며

감자 키워줄 땅에

여인은 오래 휘어진 등을 굽힌다

가장 낮게

순하게

 

바람이 불 때마다

백마사 향그런 풍경소리

귀 기울여

뼈가 무너지는 설움 헹군다

 

우리가 누려도 되는 세상 열어주려고

한 생에

혼을 사루는 일이다

 

어머니 남겨 놓은 밭둑에

찬연히 빛나는 눈물

환하게 꽃핀 꼬리조팝이 부드러운 팔을 뻗어

허물어진 이랑 다독이고

 

밭고랑 엎드려 있던

장끼가 산을 운다 

 

 

♧ 바람의 행적 - 강동수

 

나는 지금 바다를 걷고 있다

태양이 날마다 쓰다듬다 멀어진 바다의 끝을 향해 걸으면

또다시 희망처럼 멀리 달아나는 수평선

이곳에서 일어서는 바람은 새로운 이름을 달고

저만치 달려가 산을 넘는다

어떤 이에게는 눈물이 되고 죽음이 되는

바람이 일어서는 곳에서

물결 따라 사라져간 이름 하나 불러본다

 

등대의 불빛이 다시 피어날 때까지

한낮의 태양은 여전히 정해진 길을 걸어가고

구름은 바다에 더워진 몸을 적시는 한낮

물속으로 흐르는 세찬 물살에

몸을 맡기고 대양을 건너는 귀신고래를 따라가면

산티아고, 케이프타운을 지나

그 땅 끝 희망봉에 닿을 수 있을까

희망처럼 꿈이 다시 피어오를까 

 

 

♧ 그믐의 죽음 - 서상택

 

헛간 문을 연다

 

누군가 누워 있다

컴컴하고 차가운 바닥 한가운데

 

산누에나방이 죽어 있다

 

그 쪽방 노인은

죽은 뒤

보름 만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는 날마다 중얼거리며

북창(北窓)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믐에서 그믐으로 건너가는 흙바람 소리 

 

 

♧ 연애에 대한 연구 - 박원혜

 

연애에 대한 기쁨은 요만큼

연애에 대한 그리움은 이만큼

그 환희가 왜 오래가지

못하는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나

남자의 한눈팔기가 시작되고

여자의 갈굼이 시작되고

언어 소통이 안 되는

마음 소통이라고 하나

바벨탑은 시작되고

더 이상 올릴 수 없는

더 이상 내디딜 수 없는 사태 발생

뭐지

왜지 

 

 

♧ 월급날 - 임채우

 

급여명세서를 건네면

아내는 미처 닦지 않은 젖은 손으로

반색하며 나꿔챘다

생활비며 두 아이 교육비, 이것저것 제하고 나면

이번 달에도 적자 인생이라는 것 번연히 알면서도

어쩌다 보너스 붙고 효도 휴가비라도 더해지는 달엔

매달 이 정도면 얼마나 좋을까

환해지던 얼굴

 

이제 명세서 받아 줄 손이 없다

빈방에 놓여 있는 종이쪽지 한 장 

 

 

♧ 갑 티슈 - 김현욱

 

반듯한 책상 하나 얻기 위해

사는 거잖아요

그 위에

꽃무늬 갑 티슈 한 통 올려놓으려고

몸부림치는 거잖아요

 

갑에서

톡, 톡 뽑아 쓰면

폼 나잖아요

두루마리 걸어 놓은 삶이란

뻔하지 않나요

어디서 끊어야 할지 몰라

구질구질하잖아요

 

밥값도

명함도

모텔비도

갑에서 나오잖아요

튼튼한 갑 하나 얻기 위해

사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 감자 먹는 사람들 - 정진규

      - 삽질 소리

 

우리들도 그렇게 둘러앉아

삶은 감자를 먹던 때가 있었다

불빛 흐린

언제나 불빛 흐린

저녁 식탁이

누구의 손 하나가 잘못 놓여도

삐걱거렸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셋째 형만이

언제고 떠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잘 삶아진 굵은 감자알들처럼

마디 굵은 우리 식구들의 손처럼

서걱서걱 흙을 파고 나가는

삽질 소리들을 꿈속에서도 들었다

누구나 삽질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타고난 사람들이었다

새벽에는

빗줄기가 조금 창문을 두드렸다

제일 부드러웠다

새싹들이 돋고 있으리라 믿었다

오늘은 하루쯤 쉬어도 되리라

식구들은

목욕탕엘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