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홍 술패랭이꽃
머리 나는 약을 만든다고
어성초 좀 구해달라는 성화에
아침에 해안동에 갔는데,
뜰 앞에 하늘거리는
오랜만에 보는 연분홍 술패랭이꽃.
주인의 모습을 닮아
청초하게 미소까지 머금었다.
부수적으로 여러 가지 야채를 챙기고
융숭하게 대접까지 받은 후
이걸 찍고 왔다.
술패랭이꽃은 석죽과에 속한 여러해살이풀로
산골짜기의 냇가에서 자란다.
잎은 선상 피침형이며 마주나고,
7~8월에 담홍색 꽃이 가지 끝에 1개씩 달린다.
삭과는 원기둥 모양이고,
꽃이 달린 식물체를 이뇨제나 통경제로 쓴다.
우리나라, 타이완 등지에 분포한다.
♧ 술패랭이꽃 - 김승기
왜 자꾸 술에 취해 흔들릴까
가난한 삶
비바람 몰아친 적
어제오늘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왜 자꾸 갈래갈래 꽃이파리 찢어질까
한여름 땡볕 화살
맨몸으로 받아낸 적
어제오늘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가슴 설레며 춤판 벌린 젊은 날
분홍빛 꿈나래
활짝 펼치지 못했어도
한때나마 신명나게 놀았으면
그 추억만으로도 넉넉한 행복인데
이별의 벼랑 끝에서
다시 알몸으로 떨어진다 해도
부끄러운 사랑
얼굴 가릴 수 있는
누더기 모자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생각
이젠 바람에 걸어두어야지
술 취해 흔들리는 거리에서
눈물 뿌리며 쳐다보면
드맑은 하늘
총총한 별빛
언제나 저만큼에서
나를 향해 웃어주고 있는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낡아 헤진 패랭이 뒤집어쓰고
찢어지고 짓이겨지고 덧나기만 하는 상처
왜 아물지 않느냐고
어찌 마음 가득 설움만 채울 수 있으랴
♧ 패랭이꽃 - 김영호
색동옷의 소녀가 신발을 벗고
내 두 눈 속으로 들어와 숨네.
그녀가 내 머리를 통과해 가슴까지 내려가네.
심장 안의 타버린 까만 살점을 뜯어 내고
뼛속의 놀란 피를 긁어주네.
그 맑은 눈빛의 소녀
내 몸에서 숨가쁜 갈매기를 안고 나오네.
수척한 달을 업고
마른 송아지를 끌고 나오네.
밖으로 업혀 나온 나의 식솔들
패랭이꽃이 준 알약을 먹고
파란 눈을 뜨네.
꿈속, 나의 가족이
한 잎 패랭이 꽃잎 속으로 들어가
푸른 초원의 풀을 뜯네.
버드나무에 달린 별을 따먹네.
♧ 패랭이꽃이었을 거야 - 양영길
패랭이꽃이었을 거야
바람은 없었고
노을이 붉게 타고 있었던가
샘물 소리가 들리는 듯했어
아니 노래 소리였는지도 몰라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어
내가 그녀의 심장소리를 엿듣고 있을 때
샘물은 아무도 모르게 나무를 타고 올라
꽃망울로 터져 나오고 있었어
나는 그 때 수영을 하고 싶었을 거야
강을 건너고 싶었을까
패랭이꽃이 물위를 떠돌고 있었어
죽은 물고기도 떠돌고 있었어
멀리 바다가 보이는 길을 고개 숙여 걸을 때였던가
바람이 말을 걸었어
그건 말이야 앉은뱅이꽃인지도 몰라
그래, 내가 앉은자리가 조금씩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는지도 몰라.
♧ 패랭이꽃 - 이향아
속리산 가는 길에 패랭이꽃이 많았다
한 때는 그 사람이
나를 패랭이꽃이라 불렀던 때도 있었다.
입대하여 병영의 거친 들판에서
나를 본 듯 패랭이꽃을 가지었노라
편지에 썼었다.
그 시절 내 나이처럼 여리고 어여쁜 진분홍.
지금은 쇠어터진 내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저 작은 풀꽃이여.
아직은 내 눈이 밝고
귀도 가깝지만
명주실꾸리 만지듯 사려사려 세월을 감을란다.
숱한 꽃 다 두고 하필 패랭이꽃
많은 산 다 두고 하필 속리산엘 간다.
♧ 패랭이꽃 - 오순화
내가 처음 너를 보았을 때
얼굴마다 연지자국 불을 밝히고
한들한들 내 맘에 들어왔다.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곧게 뻗은 몸뚱아리 새초롬한 미소로
보실대며 내 품에 안겼다.
네가 처음 내게로 오던 날은
눈부신 오월
연분홍빛 가슴앓이가 털썩 주저앉아
끝내 사랑을 피워버렸지.
매서운 겨울에도 꺽이지 않는 너의 자태는
절망을 견뎌내는 희망을
순응하며 기달릴 줄 아는 지혜를
내 차가운 심장에 깃발로 꽂았다.
눈물 나는 날에는
빙글빙글 춤을 추며 내 맘을 달래주던 너
언제나 넌
내안에 살고 있어
비 내리는 창밖에서도
햇볕이 어슬렁거리는 길섶에서도
빙그레 웃는 열여덟 소녀의 얼굴.
너를 알고부터
자꾸만 눈에 밟혀 떠날 수 없는 나의 첫사랑
패랭이꽃이여.
♧ 패랭이꽃이 된 별 - 차성우
영겁으로 가는 길 위에 몸을 던질까
풀꽃이 되어 이슬을 맞을까 망설일 때에,
당신은 웃음만 지었습니다.
지난 밤 꿈속에,
별들이 빛나는 그림자를 그으며 떨어져
아무도 몰래 깊은 숲으로 가서
아름다운 꽃들이 되었습니다.
달 밝은 밤에
이승을 다 머물려 놓고 보았던
길섶으로 보오얀 웃음 머금고 핀
그 이쁜 꽃들이
모두 당신을 닮았습니다.
당신은 패랭이꽃이 된
별이었습니다.
꽃들이 춤추는 언덕에서 노래를 부를까,
패랭이꽃 이슬을 따다 그대에게 드릴까,
망설일 때에
당신은, 아름다운 웃음만 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