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슬포에서 본 풍경
그제 월요일은 신탐라순력도를 촬영하느라
모슬포에서 하루를 보냈다.
드넓은 알뜨르비행장
풀풀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
일제강점기 동남아를 경영하려던
일본인들의 야욕이 드러나는
비행장과 격납고,
곳곳에 파놓은 굴들.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아무런 죄 없이 죽어갔던
백조일손지묘와 만뱅디묘지에 묻힌
영혼들이 곡성의 아직도 멈추지 않는
섯알오름 탄약고터.
요즘 들어 다시 야욕을 드러내는
일본 정권을 잡은 극우파의
폭언을 생각게 하는 날이었다.
결국 한라산을 가린 구름이
걷히기를 기다리다 날이 저물어버렸다.
♧ 모슬포 - 김윤숙
하모리 시퍼런 파도 눈물처럼 시린데
팔월 여름 끝자락, 흙먼지 팍팍한 길
온몸이 흥건히 젖어 가슴 깊게 스민다
산과 바다와 오름이 나를 에워싸고
섯알오름 너른 땅 한끝으로 인도하는
바람결 그 예비검속 무참함을 듣는다
달개비 갯완두꽃 총총히 피어올라
매장했던 자리에 남겨진 것은 새 발자국
모슬포, 그 누구에게도 차마 길을 못 묻는다
♧ 겨울, 송악산 - 이애자
한 치의 웃자람도
허락하지 않을 듯
강점기 살얼음에
날을 갈던 모슬포 바람
엎디어 비수를 감춘
겨울 산이 푸르다.
와르르 무너질 때도
순종만은 아니었으리
살 터진 등성이마다
선지처럼 굳은돌들
그 틈새 추위를 견디는
질경이의
넋으로.
눈밭에 수묵 한 점
삽시에 얼룩진다
해질녘 어미염소
통통 분 귀갓길에
목 잠긴 뿔나팔소리
산허리는 휘어져.
♧ 사계바다 - 강연옥
더러는 분노로 흐려진 물빛도
파랗게 씻기고
얼어붙은 땅을 흘러온 시간도
하얗게 지우는
가장 낮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는
가슴 깊은 남자다
때론 하늘도 아픈지
천둥 번개 통째로 흔들어대며 내려와
새로운 세계를 여는 파괴의 절대음
우렁찬 파도소리
내가 슬프면 나보다 더 크게 울어주는
가슴 넓은 남자다
소금기 묻은 내 숨비 소리
바람에 실려 유채꽃 위를 날아가도
너를 알고서부터 산방산을 넘지 못하고
풀포기 자라는 형제섬에 누우면
수평선에서 붉은 심장 열어 보이는
가슴 뜨거운 남자다
희망보다 절망적일 때 더욱 그리웁고
태양이 뜰 때보다 질 때 더욱 아름다운
내 안에서 하루를 저물어 가는 남자, <아>
내 사랑 사계바다
♧ 모슬포 생각 - 이문재
모슬포 바다를 보려다가, 누가, 저 서편 바다를 수은으로 가득 채워 눈 못 뜨게 하나, 하다가, 훅, 허리가 꺾여진 적이 있다
수평선이 째앵하고 그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순간, 비늘처럼 미끈거리던 바람이 위이이이잉 몸을 바꾸는 것이었다. 바람은 성큼 몸을 세우더니, 그 무수한 손을 뒤로 제끼며 생철 쪼가리들을 날려대는 것이었다, 은박의 바람이 바다 위에서 거대한 먼지를 일으키는 거였다
황홀하고 또 무서워, 머리를 가랑이에 박았다가 눈을 떴는데, 아 섬은 거꾸로 서 있었다, 그 때, 그 옛일들이 생철 쪼가리에 범벅이 된 채 나 뒹굴고 있었다. 살점과 핏방울들이 순식간에 바람의 속도로 올라 앉는 것이 보였다. 삭막이 거대했다. 아 퍽퍽 쓰러진 것들의 바람에 풀썩거리는 모양이 황막하고 광막했다, 나는 가자미처럼 납작하게 땅에 엎드려 두 눈을 감았다, 눈물이 피융피융 튀어나가고 있었다
다시는 그리움이 내일이나 어제 쪽으로도 옮겨가지 않으리라, 그래, 그리움의 더께가 녹슬어 을씨년으로 변하겠구나, 생각의 서까래도 남아나지 않았겠구나, 그래, 이 폐가의 흔적이나 한 채 껴안고 살면 되는 거지, 생철, 아니 날치의 바람아, 이제 그만 후두둑 멈추어라, 하고, 고개를 한 뼘 드는데, 저 납의 바다가 느물, 아니 기우뚱거리는구나, 하는데, 쌔애애애앵, 퍽, 오른쪽 눈에 생철 조각 하나가 박혔다
누군가 떠나면, 또 다른 누군가는 이렇게 남는다
그해 삼월 모슬포 바다에 나는 있었다
♧ 마라도·3 - 김시탁
사랑에 마음을 다친 사람들
상처 난 마음을 버릴 곳 없는 자는
마라도로 가라
모슬포항에서 뱃길로 30리쯤 더
남으로 들어가면
상처받은 사람들을 업어줄
움크린 등 넓은 섬 하나 있다
그 섬에 뱃머리가 닿으면
제일먼저 바람이 검문을 한다
신분증대신 시커멓게 탄 가슴을 보여주고
바람이 등 떠미는 곳으로 올라가라
올라간 그 곳에 절벽이 있다
절벽 그 위에서
절벽 아래로 던져진 마음을 보라
허옇게 뼈까지 부서진 사랑을
물어뜯는 파도가 있다
추락한 꿈들이 뇌사상태일때
마라도의 배들은 고동을 울려
그 영혼을 달랜다
무엇이든 끝에 서본 자만이
시작을 꿈 꿀 수 있다
♧ 왜 가느냐 - 이생진
- 마라도 27
모슬포 사람이라도
마라도 가는 길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마라도 가는 나루터가 어디죠?” 물으면
어느 사람은 머리를 갸웃거리고
어느 사람은 머뭇거리고
바다 끝 마라도 가는 길이 바로 코앞인데
마라도 가는 길을 모른다
물 건너 서울 가는 길은 알아도
눈앞의 마라도 가는 길은 모른다
마라도 주민 육십여 명
그분들에게나 절실한 길
그밖에 사람들은 모른다
서울 가는 비행기 방향은 가리켜도
바람 부는 마라도 그곳엔 왜 가느냐고
다시 묻는다
바람 불기 때문에 간다
파도치기 때문에 간다
가다가 끝이 나기 때문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