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물봉선 피는 계절

김창집 2014. 9. 7. 00:30

 

7월말에 태백산에 갔을 때

물봉선을 만났었는데,

제주에서는 어제야 영아리오름에 갔다가

비로소 이 꽃을 만날 수 있었다.

 

물론 내 눈에 안 뜨인 것일 뿐

8월말부터 피었을 것이다.

 

육지부에서는 보통으로

분홍색은 물론 노랑색과 미색이 있는데

이곳 제주에서는 분홍색밖에 본 일이 없다.

 

고깔모자가 아름다운

물봉선 꽃

 

세상 여러 가지 꽃 가운데서

몇 안 되는 개성이 넘치는 꽃이다.

 

제자리걸음으로 세월을 보내는

이 속절없는 세상에도

추석이 찾아온 것처럼

물봉선도 그렇게 피었다.

   

 

♧ 물봉선의 고백 - 이원규

 

내 이름은 물봉선입니다

그대가 칠선계곡의 소슬바람으로 다가오면

나는야 버선발, 버선발의 물봉선

 

그대가 백무동의 산안개로 내리면

나는야 속눈썹에 이슬이 맺힌 산처녀가 되고

 

실상사의 새벽예불 소리로 오면

졸다 깨어 합장하는 아직 어린 행자승이 됩니다.

 

하지만 그대가

풍문 속의 포크레인으로 다가오고

소문 속의 레미콘으로 달려오면

나는야 잽싸게 꽃씨를 퍼뜨리며

차라리 동반 자살을 꿈꾸는 독초 아닌 독초

 

날 건드리지 마세요

 

나비들이 날아와 잠시 어우르고 가듯이

휘파람이나 불며 그냥 가세요 

 

행여 그대가

딴 마음을 먹을까봐

댐의 이름으로 올까봐

내가 먼저

손톱 발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며

맹세를 합니다 첫눈을 기다립니다 

 

내 이름은 물봉선

 

여전히 젖은 맨발의 물봉숭아 꽃입니다

   

 

♧ 물봉선(14) - 손정모

 

한기가 살얼음처럼 깔리는

만추가 되면

개울을 따라 번지는

선홍색의 꽃물결

 

5학년 동급생이어도

말 한 마디

없었던 아랫동네

소녀

 

늦가을 한낮에 들러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엄마의 재 뿌리는데

좀 도와 줄래?

 

나룻배에서 재를 날리고

석양이 지는 강둑에서

눈물 글썽이며 흐느끼고는

마을 떠난 그녀.

 

꽃잎에 내비친 실핏줄마다

상기된 소녀의 얼굴

자줏빛 저녁놀에 잠겨

불길처럼 일렁인다.  

 

 

♧ 물봉선 - 백우선

 

그늘지고 젖은 산골짜기

 

끊임없는 냉천 시리디시려

 

해도 해도 못다 푼 말

 

노래를 한다

 

노랑, 분홍나팔 피워 들고

 

말 중의 말, 뼛속의 말로

 

곪고 곪아 아득한

 

꽃등을 노래한다  

 

 

♧ 물봉선 - 김종구

 

개울 물소리에 발 적시고

누굴 기다리나

 

립스틱 짙게 바르고

수정거울 들여다본다.

 

수줍은 미소

실바람에 실어 보내며

 

뼈마디 퉁퉁 붓도록

그리움의 뒤꿈치 들고 서 있다.  

 

 

♧ 물봉선 - 권오범

 

외로움이 터전인 심심산천

태어나자마자 최대한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야 하는 팔자기에

늘 허출한 깔때기가 되었다

꼬리마저 살짝 말아 내린 채

오매불망 미지의 사랑만 그리다 보니

홍 자줏빛으로 달아올라

열없이 건넌 성하의 강,

호시절 지나 처참하게 사그라진 꿈

가까스로 추슬러

부르르 떨리는 조막손만 남았는데

고추잠자리야 헤살부리지 마라

장맛비 유달리 지짐거려

외로움이 독이 되어 서린 몸

나를 건드리지 말아다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으니까  

 

 

♧ 물봉선 - 김승기

 

예전에는

논밭둑 도랑가에서도 지천으로 피었지요

장마철에 홍수 일면

물에 쓸려 허리 부러져도

금새 뿌리 뻗어 새롭게 꽃을 피웠지요

가슴에 품은 정열

건드리면 터져 버릴까

꽤나 조바심도 떨었지요

이제 깊은 산에서 살아야 하는 몸

지나간 꿈으로 남았네요

더 외로워지겠어요

씨방 하나 제대로 맺지 못하고

뿌리로만 뻗는 몸 될지라도

내가 있어야 하는 곳

당당하게 꽃 피우겠어요

날로 더럽혀져 어지러운 세상

내 몸 자리잡을 한 줌의 땅덩이 남지 않을지라도

가장 청정한 물가만을 골라

터 잡고 꽃 피우는 고집

버리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