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9월호의 시와 꽃무릇

김창집 2014. 9. 12. 00:02

 

  생명과 자연과 시를 가꾸는 ‘우리詩’ 9월호가 왔다. ‘권두 에세이’는 오명현의 ‘시詩 몇 가지 생각’, ‘신작詩 16인 選’은 김영호 김금용 박원혜 도경희 권혁수 이애정 김연아 정영희 임미리 강동수 박병대 임채우 신단향 황옥경 최유진 임희선‘의 시 각각 2편씩, 특별기획 연재시詩’로 홍해리의 ‘치매행(致梅行)’ 시편(4)을 실었다.

 

  ‘시지 속 작은 시집’은 마경덕의 ‘빌려 쓰다’외 6편과 최선옥의 해설,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유진의 ‘범종 소리’ 외 9편을 시작노트와 함께, ‘시인이 읽는 시’는 홍예영과 박정원이 맡았고, 한시한담은 조영임, 끝으로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로 맺고 있다.

 

  이번 ‘우리詩’ 9월호의 시를 곱게 장식해줄 것은 꽃무릇이다. 지금 제주의 이곳저곳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꽃무릇 같은 애틋한 상사화류의 꽃들을 생각하면 다분히 시적이다.

   

 

♧ 흰 밤- 백석

 

옛城의 돌담에 달이 올랐다

묵은 초가지붕에 박이

또 하나 달같이 하아얗게 빛난다

언젠가 마을에서 수절과부 하나가

목을 매여 죽은 밤도

이러한 밤이었다 

 

 

♧ 화양동 계곡 - 김영호

 

젖이 퉁퉁 불은 해가

나무들에게 젖을 물렸다.

젖을 빨던 어린 물푸레나무

계곡 물속 제 발가락을 빠는

등 푸른 물고기들을 세어본다.

 

낮달도 산 물로 배를 채운다.

 

산양 젖내음 흥건한 산 물을 찍어

한 마리 산비둘기

굴참나무 깨진 손등에 약을 발라주고

키가 큰 산꽃들

물속의 햇살을 찍어

화장을 한다.

 

산꿩 울음소리가 온 산에 불을 질렀다.

 

물속의 해를 공 삼아

송사리 떼들 족구놀이를 한다.

 

나무들 몸속에 애인이 찾아왔는가

모두 옷이 젖었다.

   

 

♧ 비누나무열매 - 권혁수

 

그 여자가 비누나무 열매를 보내왔다 티베트 먼 나라에서

 

그리운 마음 졸이고 졸여 한 주머니 보내왔다

 

이별이 얼룩진 까닭을 씻고 씻어 얼굴 밑에 숨겨둔

 

하얀 얼굴로 걸어오라고 걸어와

 

거룩하게 만나자고

 

명상의 시간을 보내왔다 하얀 비누나무의

 

동그랗고 작은 열매를 따서 곱게 보내온 그 눈매를 그리며

 

나는 몸을 닦고 또 닦았다 눈도 씻었다 아침에 한 번

 

저녁에 두 번 불안한 그늘에 향 사르고 우울한 기억에 빛 뿌리고

 

착하고 부드럽게

 

하루하루 내 납작해진 영혼의 낙엽마저 말끔히 떨어냈다

 

하얀 비누나무 한 그루 되어

 

그 날, 그 여자 앞에 우뚝 서고 싶어

   

 

♧ 열대야일기 - 이애정

 

줄을 잡고 내려온 밤

절벽처럼 주변은 조용하다.

 

아름다움도 슬픔도

모두가 평등해져있는

극히 정제된 어둠만이

단단한 침묵을 모은다

 

 

인연과 악연 사이를 오가며

견디는 것보다

노는 것이 좋은

불면의 밤

 

여전히 홀로 남겨진 나는

오늘 또 하나의 무덤을 쌓고 있다.

   

 

♧ 거리의 화가 - 임미리

 

청순한 이미지를 살리겠다고 고음으로 말하며

화가는 잃어버린 꿈처럼 찌든 겨울옷 상의를 벗는다.

옷을 벗자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자줏빛 긴 소매

그 위에 덧입은 잿빛 반소매가 헐겁다.

십 분이면 완성된다며 의자에 편하게 앉으란다.

신뢰가 가지 않는 낡은 겉모습과는 달리

그리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는 남자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맹수처럼 눈빛이 살아있다.

끊임없이 실선을 그어대는지 흔들리는 손끝 사이로

눈빛은 오로지 그린다는 꿈에 집중되어 있다.

살짝 눈웃음을 쳐보라길래 찡긋 웃어 주었더니

남자는 한쪽 눈을 더욱 찡긋거린다.

얼굴의 주름살 하나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쳐다보고 또 쳐다보며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미세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언뜻 하늘을 날고

매듭을 짓는 손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십 분 동안 천 번쯤 나를 쳐다본 빛바랜 꿈

최선을 다했다는 듯 남자는 눈빛을 거둔다.

거리의 화가 손끝에서 새롭게 태어난 나

근심 없는 소녀처럼 환하게 웃어본다.

  

 

♧ 장터에도 인어人魚가 산다 - 강동수

 

5일장이 열리는 날이면

 

인파 사이를 느리게 배회하는

 

인어를 만난다

 

수초 같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미끄러져 가는 인어 한 마리

 

그의 가는 길이 어릴 적 뛰놀던 골목길처럼 구부러져있다

 

시장에서 가장 큰소리로 울리는

 

찬송가가 그의 앞길을 여는 눈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동전으로 부피를 더하는 밥그릇

 

고개 숙인 인어는 말이 없다

 

그는 지금 심해의 바다를 잠수중이다

 

파장이 오면 그의 보금자리에도 저녁이 내리고

 

따뜻한 밥 한 그릇에 닻을 내리러

 

유영해 가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섬에서 인어의 몸을 벗은 한 남자를 상상하며

 

내일 또 다시 세상을 품안으로 안고

 

밀려오는 파도를 헤치며 생의 건널목을 건너야할

 

저문 저녁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나는 그가 어릴 적 꿈꾸었을 바다와

 

인어로 헤엄쳐 건너야할 남은 생을 생각하는 것이다

   

 

♧ 유경(幽境) - 임채우

    -청전 이상범의 그림을 보고

 

화폭 가득 낮은 산이

소리 흐르는 물

위에 떠 있다

 

개울 따라

풀더미에 묻힌 산길

황소걸음으로 뚜벅뚜벅 아침을 열면

바지게를 짊어진 촌부(村夫)

낫같이 휘어진 허리 뒤따른다

 

서리 내린 듯

무수히 꺾인 갈대들

세상은 성큼 쇠락으로 들어서는데

그 어디선가 본 듯한

그윽한 곳

   

 

♧ 노래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 33

 

눈물로 노래를 씻어 부르면

노래마다 구구절절 빛이 날까

눈썹 끝에 별을 달고

홀로 가는 길

별 내린 풀숲에서

실을 짜 엮고 있는 풀벌레들

계절은 가릉가릉 현악기로 울리고

달빛 타고

하늘 가득 날아가는 기러기 떼

허공중에 떠가는

수많은 섬이구나

날갯짓마다 파도가 일어

가을이 젖는데

내 저 섬을 비추는 등대라면

하늘길 안내하는 불빛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