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구절초의 순결
가을이 깊어지면서 한라구절초가 피었다.
엊그제 추자도 돈대산에서 실컷 보았던
그 구절초와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들국화라 불리는 여러 종류의 꽃들,
이를 테면 산국이나 감국, 쑥부쟁이와는 달리
청초한 모습을 하고 있다.
새하얀 그 색감이
‘순결’을 생각케 한다.
한라구절초는 국화과 여러해살이풀로서
한라산 해발 1,300m 이상에서 자란다.
산국과 감국에 비해 두상화가 크고
가지 끝에 1개씩 달리며 총포 편은 선형이다.
9월 9일 중양절에 꽃이 피기 때문에
구절초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한라산에 자란다고
한라구절초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줄기 높이는 20㎝ 정도이고 지하경은 옆으로 뻗고,
잎은 호생하며 가늘게 깃 모양으로 갈라지고 육질이다.
꽃은 보통 흰색, 분홍색이며 두화는 가지가 갈라지는
화경 끝에 1개씩 피고 두상 화서의 지름은 5~6㎝이다.
9~10월에 피고, 결실기는 10~11월이다.
♧ 구절초 - 신석종
가을 산,
명치 끝 같은 곳에
구절초 피었다
아홉 번 꺾여
관절 마다 찬바람 든
저 질긴 목숨들,
올창묵 닮은
연보라 꽃잎 위에
고명처럼
노란 꿀벌 한 마리
앉아 졸고 있다
♧ 구절초 - 현상길
무심히 가던 길
빗방울 차갑고 바람 잦던 길
향로봉 흐르는 능선에
봄날의 약속도 없이
상강霜降날 흰 서리 이고
그대 날 기다리고 있었네
산 아래 햇볕 등 밀어 오르는 길
세월이 일렁이는 안개 저 편
저미는 추억의 날갯짓 사이
해쓱한 수줍음
그대의 미소였네
가슴 스치는 속삭임 따라
멈추어 문득 돌아보았네
세상 일 두런대는 억새 틈에서
하얗게 손사래치고 있었네
그대의 향기였네
♧ 구절초 꽃 - 홍윤표
산사에 소요(騷擾)가 일어나듯
다투어 앞으로만 걷는 너의 자태는
가을빛에 스승이 되었구나
가던 길 잃어 손을 놓은 그 아픔
유배라도 간 듯 옹기종기 시월의 하늘엔
운명을 여는 바람꽃이 피었구나
날카로운 외투 깃 세우고
산길 걸어 구만리 정상에 올라
목놓아 너를 부르니
귓전 가까이 들려오는
너의 의기소침한 신음소리는
가늘한 비밀을 남기었구나
지금도 영랑사에 내리는
옅은 햇살 속을 걷는 바람아
수줍은 얼굴 간지르는 생명의 꽃이 되었으랴
구절초, 나의 구절초 꽃
노랑배꼽을 내놓고 하늘을 보는
너의 순결은
수줍음 없는 자유의 혼이었구나.
♧ 구절초 - 김영천
물 흐르는
소리와도 같이
노래 소리와도
같이
마음 깊은 곳을 향해
첨벙 첨벙
건너오던 바람도
지레
멈추었을라
햇달은 사알짝
미역을 감고
물새 때 일제히
날아 오른다
그 물길을 따라
천 년도 내내 흔들리던
향기
톡,
톡,
제 아픔을
하얗게
피어 낸다
♧ 구절초 엽서 - 이정자
먼 산 가까워지고 산구절초 피었습니다
지상의 꽃 피우던 나무는 제 열매를 맺는데
맺을 것 없는 사랑은 속절없습니다
가을 햇살은 단풍을 물들이고 단풍은 사람을 물들이는데
무엇 하나 붉게 물들여보지도 못한 생이 저물어 갑니다
쓸쓸하고 또 쓸쓸하여
찻물을 올려놓고 먼 산 바라기를 합니다
그대도 잘 있느냐고,
이 가을 잘 견디고 있느냐고
구절초 꽃잎에 부치지 못할 마음의 엽서 다시 씁니다
♧ 구절초 - 박종영
섬 동백 꽃자리 잡아 틀고
이맘때 터울 좋은 자리를 잡은 구절초,
넌실넌실 피어올라
환해지는 오솔길,
그 웃음꽃에 살며시 앉아보면
어쩔 수 없이 속마음 드러내고
달려오는 가을 파도,
무딘 가슴에 가득 고여 우람한 사랑으로
일어서게 숨가쁘고,
자꾸만 으쓱진 곳으로 잡아당기는
얇은 햇살,
그 안에 살포시 내려앉아
옷을 벗는 꽃잎들,
그냥 꽃잎이 아니라
날랑날랑 하얀 속살 드러내고
포개지는 가슴 벽,
이를 어찌 함부로 밀어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