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폭설이 내리는 날에

김창집 2014. 12. 17. 10:49

 

방안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눈 오는 풍경

 

오름을 알면서부터

좋아하게 된 눈밭

 

이제는 햇살이 비치는 눈밭보다

오히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광야를

즐기게 되었으니

병이 아닐까?

 

지난주는 토요일, 일요일 두 번

지지난 주는 일요일 한 번

벌써 세 번이나 눈밭을 다녀왔다.

 

오늘 수요 오름 팀은

눈밭을 가기로 했던데

지금 어디쯤 눈밭을 헤매고 있을까?

   

 

♧ 폭설 - 박인걸

 

아련하던 기억이

하염없는 폭설에 되살났다.

퍼붓던 눈이 길을 지워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밤새도록 헤메던 그해 어느날

간간히 새 나오던 불빛 마저

눈발에 가려 사라진

흰 눈 속에 갇혀 캄캄했던

모순의 부조화에

나는 더욱 혼란 스러웠다..

의식의 방에 저장되었던

방황하던 그 밤의 경험이

그칠줄 모르는 눈발이

불러오기를 클릭하며

하나 둘 눈 앞에 되살아난다.

가벼운 눈발이 흩날릴 때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떠난 고집이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될 줄이야

누군가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눈 속에 영원히 사라졌을

폭설의 두려운 기억에

눈에서 눈길을 잠시 돌린다.

 

 

 

♧ 폭설 - 오보영

 

네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내가

 

여유가 있어서다

 

내게 쉼이 있고

내 마음이 평안하여

 

맑고 깨끗한 모습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서다

   

 

♧ 暴雪폭설 - 이진숙

 

눈송이만한 그리움이라도 남아있는 걸까,

아슴하게 솟구치는 불빛들이

가로등을 스치는 눈발에

발갛게 멍이 든다

 

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모든 것이 사라진

비어있음이 눈부셔

고개 숙인 채

나도 하얗게 눈이 된다

 

어디만큼이나 온 것일까,

가늠할 수도 없는 포근함이

서러워

 

왈칵 눈물 쏟아지는,

 

스쳐 가는 바람이여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 속에 부러지는

나의 가지들,

 

툭툭

눈 터는 소리, 소리

들릴 뿐

  

 

♧ 폭설 - 권경업

 

어제와 내일로

이어지는 능선길

장막을 가리듯

함박눈 푸슬푸슬 퍼붓는 날

때늦은 라디오의 폭설주의보

조난자 명단에 내가 끼이고

멈추지 않는 눈보라

하루 이틀 사흘

꿈길로만 길이 열려

움트는 봄언덕, 찌르레기 소리

젖은 침낭 안에서 들린다

   

 

♧ 폭설(暴雪) 1 - 구재기

 

눈부신 아침볕과

눈 쌓인 겨울숲이 마주하면

 

간밤의 꿈이란

이다지도 부질없어지는구나

 

아, 절망보다도 더 인간적인

이 황홀한 폭력

 

인간이기가 이토록

버거워지는구나

   

 

♧ 폭설, 그 후 - 김경숙

 

눈은 얼마나 더 내려

많은 것을 덮으려는지

하염없이 성긴 눈을 뿌려댄다

 

시야를 흐리게 하던

끌고 다닌 어두운 기억들과

마른 풀잎의 서걱임도

눈 속에 깊숙이 묻히고

 

섣불리 봄을 노래하려던

초록의 작은 몸짓,

개여울의 낮은 울림도

눈 속에 잠겨 해설解雪을 기다린다

 

폭설에 모든 것이 잠긴다

은빛 세상에 초대받은

투박한 나의 언어마저도

눈 속에 잠겨 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