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이 내리는 날에
방안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눈 오는 풍경
오름을 알면서부터
좋아하게 된 눈밭
이제는 햇살이 비치는 눈밭보다
오히려 눈이 펑펑 쏟아지는 광야를
즐기게 되었으니
병이 아닐까?
지난주는 토요일, 일요일 두 번
지지난 주는 일요일 한 번
벌써 세 번이나 눈밭을 다녀왔다.
오늘 수요 오름 팀은
눈밭을 가기로 했던데
지금 어디쯤 눈밭을 헤매고 있을까?
♧ 폭설 - 박인걸
아련하던 기억이
하염없는 폭설에 되살났다.
퍼붓던 눈이 길을 지워
길 위에서 길을 잃고
밤새도록 헤메던 그해 어느날
간간히 새 나오던 불빛 마저
눈발에 가려 사라진
흰 눈 속에 갇혀 캄캄했던
모순의 부조화에
나는 더욱 혼란 스러웠다..
의식의 방에 저장되었던
방황하던 그 밤의 경험이
그칠줄 모르는 눈발이
불러오기를 클릭하며
하나 둘 눈 앞에 되살아난다.
가벼운 눈발이 흩날릴 때
붙잡는 손길을 뿌리치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떠난 고집이
때늦은 후회를 하게 될 줄이야
누군가의 손길이 아니었다면
눈 속에 영원히 사라졌을
폭설의 두려운 기억에
눈에서 눈길을 잠시 돌린다.
♧ 폭설 - 오보영
네가
아름다워 보이는 건
내가
여유가 있어서다
내게 쉼이 있고
내 마음이 평안하여
널
맑고 깨끗한 모습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서다
♧ 暴雪폭설 - 이진숙
눈송이만한 그리움이라도 남아있는 걸까,
아슴하게 솟구치는 불빛들이
가로등을 스치는 눈발에
발갛게 멍이 든다
길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모든 것이 사라진
비어있음이 눈부셔
고개 숙인 채
나도 하얗게 눈이 된다
어디만큼이나 온 것일까,
가늠할 수도 없는 포근함이
서러워
왈칵 눈물 쏟아지는,
스쳐 가는 바람이여
이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 속에 부러지는
나의 가지들,
툭툭
눈 터는 소리, 소리
들릴 뿐
♧ 폭설 - 권경업
어제와 내일로
이어지는 능선길
장막을 가리듯
함박눈 푸슬푸슬 퍼붓는 날
때늦은 라디오의 폭설주의보
조난자 명단에 내가 끼이고
멈추지 않는 눈보라
하루 이틀 사흘
꿈길로만 길이 열려
움트는 봄언덕, 찌르레기 소리
젖은 침낭 안에서 들린다
♧ 폭설(暴雪) 1 - 구재기
눈부신 아침볕과
눈 쌓인 겨울숲이 마주하면
간밤의 꿈이란
이다지도 부질없어지는구나
아, 절망보다도 더 인간적인
이 황홀한 폭력
인간이기가 이토록
버거워지는구나
♧ 폭설, 그 후 - 김경숙
눈은 얼마나 더 내려
많은 것을 덮으려는지
하염없이 성긴 눈을 뿌려댄다
시야를 흐리게 하던
끌고 다닌 어두운 기억들과
마른 풀잎의 서걱임도
눈 속에 깊숙이 묻히고
섣불리 봄을 노래하려던
초록의 작은 몸짓,
개여울의 낮은 울림도
눈 속에 잠겨 해설解雪을 기다린다
폭설에 모든 것이 잠긴다
은빛 세상에 초대받은
투박한 나의 언어마저도
눈 속에 잠겨 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