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제주시조와 아프리카 가면

김창집 2014. 12. 26. 00:00

 

제주시조 제22호가 나왔다.

두툼하니 무게가 실린 책으로,

 

‘단시조로 여는 도두를 읊다’로

8월에 열렸던 도두올레 행사에

손바닥 시집 발간했던 시조와

경기대 이지연 교수의

‘현대시와 현대시조의 소통’,

회원작품,

‘시 속의 시인의 삶’ 고영기 편

뒤에 ‘제23회 제주시조 지상 백일장’에서 입상한

일반부, 고등부, 중등부, 초등부 작품을 실었다.

 

그 중에 몇 작품을 골라

지난 일요일

아프리카박물관에서 찍은 가면과

몇 장의 유물 사진을 올린다.

 

 

♧ 가을의 시 - 김영란

 

까마득

 

불혹을 넘긴

 

바람이 지나가네

 

오솔길 횡단하는

 

풀무치 날개 위

 

이내에 잠겨 내리는

 

고독하다.

 

풀내음

   

 

♧ 영남동* 무주선원 - 김영숙

 

차 한 잔 하고 가요

원도 한도 내려놓고

 

아픈 자 아프게 한 자

모두 불러 세우고

 

이끄네

젖은 손들을

콩알 절집 원추리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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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동 : 서귀포시 대천동에 있는 잃어버린 마을

   

 

♧ 빈집의 화법 - 김진숙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린 적 있었다

감물 든 서쪽 하늘 물러지는 초저녁

새들이 다녀가는 동안 버스가 지나갔다.

 

다 식은 지붕아래 어둠 덥석 물고 온

말랑한 고양이에게 무릎 한 쪽 내어주고

간간이 떨어진 별과 안부도 주고받지.

 

누구의 위로일까 담장 위 편지 한 통

‘시청복지과’ 주소가 찍힌 고딕체 감정처럼

어쩌면 그대도 나도 빈집으로 섰느니.

 

직설적인 말투는 잊은 지 이미 오래다

좀처럼 먼저 말을 걸어오는 법이 없는

그대는 기다림의 자세, 가을이라 적는다.

   

 

♧ 들장미 - 오영호

 

오름자락 돌담길에 별빛 담아 만개한 찔레

 

지난 밤 몽정을 한 벌 나비 날아들어

 

껴안은 암술과 수술

 

5월 한낮 오르가즘

   

 

♧ 꼴값 - 이애자

 

납작한 동그라미 모난 데 없어 좋다더니

 

융통성 없는 네모 반듯해서 좋다더니

 

뾰족한 세모에게는 뾰족한 수 있을 거라나

   

 

♧ 새 한 마리 - 장영춘

 

만년 꽃인 줄 알았던

아내 먼저 보내고

 

사는 게 죄만 같다며

눈시울을 적시던

 

턱 괴고

빈방에 앉은

김 씨의 초점 없는 시선

 

도수 높은 돋보기로도

헤아리지 못하는 삶

 

간절한 눈빛조차

허방처럼 놓쳐버린

 

길 뜨던

벚꽃 한 잎이

계단 위에 내린다

   

 

♧ 어리목 - 한희정

 

그 순간 진심이라, 사랑이라 말하려거든

이곳에 발 놓지 마시라 괜한 투정 마시라

수많은 발길질에도 가슴 죄다 열었으니

 

한때는 오름과 오름 단절을 꿈꾸었을,

숲은 하늘 가렸고 계곡은 메아릴 숨겼다

입산 길 허기진 저녁 생미 같은 별빛 한 말

 

말, 말, 말 가득차도 길은 더 침묵했다

달빛 촉촉 내린 밤은 풍문도 진실 같아

숨겨온 그리움들을 산그늘에 포갠다

   

 

♧ 관심 - 홍경희

 

붉거나 푸르거나

미운 정도 정이 들면

 

너덜너덜 외로움도

따뜻한 집 찾아갈까

 

북받친 노을이 질 때

새떼들을 쫓는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