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미라이 학살터
* 추모탑과 그 앞에 곱게 피어있는 채송화
재작년에 이어 이번에도 손미 마을에 있는 미라이 전쟁박물관을 찾았다. 학살 당시 외아들이라 온 식구들이 몸으로 막아 살려 냈다는 유일한 생존자인 관장으로부터 박물관 소개를 받고, 다시 그 처절한 기록물이 있는 전시관을 돌아보았다. 너무도 잔인한 인간들의 만행을 돌아보며 다시 한 번 몸서리쳤다. 여기서는「위키백과」에 나온 사건 내용과 함께 추모비와 박물관 주변 학살 현장 일부를 소개하며, 그 전시내용은 다음에 틈을 보면서 사진과 함께 실을 예정이다.
* 학살이 자행되던 그 날 골목길의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 다급한 상황에서 갈 곳을 못찾아 허둥대던 자전거 바퀴와 발자국, 그리고 그 뒤를 쫓던 군화발자국.
미라이 학살은 베트남 전쟁 중인 1968년 3월 16일 남베트남 미라이에서 발생한 미군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대량 학살이다. 347명에서 504명으로 추정되는 희생자는 모두 비무장 민간인이었으며, 상당수는 여성과 아동이었다. 더욱이 몇몇 희생자는 성폭력이나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으며 시체 중 일부는 절단된 채 발견되었다. 이 사건에는 미군 26명이 가담하였으나 입대한 지 4개월 2주밖에 되지 않은 윌리엄 켈리 중위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 그날의 처절한 모습을 모자이크해 놓은 곳과 학살 집터 입구에 희생된 내용을 적은 간판.
♧ 배경
미국 육군 23보병사단, 11여단, 20보병연대, 1대대, 찰리 중대는 1967년 12월 남베트남에 투입되었다. 투입 첫 달은 별다른 교전이 없는 상황이었다. 3월 중순이 되자 중대원 5명이 부비 트랩에 의해 사망하였다.
1968년 구정 대공세 기간 동안 꽝응아이에서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48대대가 미군을 공격했다. 그 결과 미라이를 비롯한 여러 촌락이 흩어져 있는 꽝응아이의 손미 지역이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미군은 이 촌락들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결정했다. 오란 K 헨더슨 대령은 “거기 가서 확 쓸어버려”라고 지시하였다. 프랭크 A 베이커 중령은 1대대에게 가옥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농경지를 불사르고 우물을 폐쇄하라고 명령하였다.
작전 전날 저녁 중대장 어니스트 메디나는 손미에서 시장이 철시되는 오전 7시까지 남베트남 해방전선이거나 동조자로 의심되는 모든 민간 저항군을 몰아낼 것이라고 작전 개요를 중대원들에게 설명했다. 후일 메디나는 이 작전 계획이 여성이나 아동까지 포함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진술하였으나, 작전에 참여했던 소대장과 병사들은 자신들이 여성이나 아동, 가축을 가리지 않고 손미 지역의 모든 것을 게릴라 용의자로 간주하라고 지시받았다고 진술하였다. 다른 두 중대가 미라이 지역을 포위하는 동안 찰리 중대는 1소대를 선두로 미라이에 진입하였다.
* 아직도 몸에 당시에 뚫린 몇 개의 탄흔을 안은 채 그날의 비극을 증언하며 열매를 매달고 있는 야자수.
♧ 학살
1968년 3월 16일 아침 찰리 중대는 공격용 헬리콥터를 통해서 소구경 대포와 함께 미라이에 진입했으나 적군을 찾을 수 없었다. 미군들은 가옥을 수색하여 사람들을 마을 한가운데로 몰아세우고 자동화기로 학살하였다. 1소대는 70명에서 80명의 사람들을 2소대는 미라이 북쪽 미라이 4 촌락에서 60명에서 70명의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3소대는 도피하는 "적"을 추적하여 12명의 여성과 아동을 사살하였다. 찰리 중대가 작전완료를 보고하자 4대대가 미케 4 촌락 도착하였으며 90명 이상을 학살하였다. 이후 이틀간에 걸쳐 두 대대는 작전지역의 가옥과 우물을 파괴하였다.
* 당시 학살 현장을 재현한 모습과 학살 당한 사람들이 살던 집.
♧ 헬기 정찰
헬리콥터 조종사 허그 톰슨 Jr. 일급 준위는 작전지역을 비행하다가 노인, 여성, 아동으로 이루어진 비무장 민간인이 죽어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저항을 했다는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비무장 여성이 사살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톰슨 준위는 곧바로 무선으로 도움을 청하고 그곳에 착륙하여 자신의 헬리콥터에 부상자와 시체를 가능한 실어 옮기겠다고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1소대장 켈리 중위는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며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톰슨 준위는 파여진 구덩이에 들어가 있는 여성과 아이들을 발견했으며, 2소대장에게 그들에게 발포할 경우 응사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는 여성과 아이들을 헬기에 실었다. 톰슨 준위와 동료들은 그들을 실어 나른 뒤 다시 미라이에 돌아와 시체들 속에서 4살이 채 안 돼 보이는 소년을 구할 수 있었다. 1994년 미국은 톰슨에게 장병의 훈장을 수여하였다. [‘위키 백과’에서]
* 학살 당시 처절하게 죽어가는 모습을 표현한 석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