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작은 詩앗 채송화의 ‘먼 산’

김창집 2015. 2. 1. 23:36

 

오랜만에 노꼬메 오름에 다녀왔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쌓인 눈으며 

벚꽃 핀 것 같이 상고대가 낀

겨울 나무를 보았다.

 

시심이 돋아나는 하루

더러는 나무가 떨어내는 눈을 맞으며

멀리 뛰어가는 노루를 보면서

 

지난번에 읽다 둔

작은詩앗 채송화 동인의 시집 제12호

'먼 산'의 시와 같이 싣는다.

 

 

♧ 굶주림과 독수리* - 박정자

 

검은 폭염 등짝을 불사르는데

떨며 움츠리는 뼈마디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엎드려 숨 고르는 아프리카 소녀

화들짝 놀라며 제 발에 미끄러지며

머리를 들이대며 저항하는 어린 진흙

등 뒤에서

기진한 살덩이의 최후를 기다리는

독수리 눈빛은 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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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빈 카터의 사진. 1994년 퓰리쳐상 수상. 캐빈은 이 사진 때문에 수상 3개월 뒤 자살했다.

   

 

♧ 선암사 가을 매화 - 소복수

 

오래 기다리다

차려놓은 상을 물리듯

꽃을 물리고

그렇게

잎을 물리고

 

옛 가지 그대로

차꽃 향기 스며들어

다 거둔 상에 새로 차린

가을 매화

 

차꽃으로부터

매화에게로

 

매화로부터

차꽃에게로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 - 이제니

 

코끼리는 간다

들판을 지나 늪지대를 건너

왔던 곳을 향해 줄줄이 줄을 지어

 

가만가만 가다 보면 잔디도 밟겠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발 아래 잔디도 그늘이 되겠지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속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나아갔다가 되돌아갔다가

코끼리는 간다 

 

 

♧ 얼룩말 - 하린

 

철학자가 남긴 얼룩말 때문에 진눈깨비가 내린다

 

얼룩이면 얼룩이고 말이면 말이지

왜 얼룩말인가

목소리에 밑줄을 긋고

철학자가 남긴 마지막 명언을 씹어본다

역시 말의 고기는 질기다

하나의 얼룩이 또 하나의 얼룩과 엉킬 때

떼어낼 수 없는 피곤이 몰려든다

 

진눈깨비는 더 이상 어정쩡이 아니다

분명한 얼룩이다

   

 

♧ 종자 - 오은정

 

심을 것인가

먹을 것인가

 

봄이면 찾아오는 유혹

   

 

♧ 그 곳에 나를 두고 왔다 - 김길녀

 

당신,

 

문 앞에서

 

울고 싶은 날

 

   

 

♧ 아스라이 - 나기철

 

죽은 감나무

너머

수樹평선

아래

무덤 하나

그 위

운雲평선

한라산 머리

 

아직은

아내와 둘

   

 

♧ 엄마 - 나혜경

 

몸의 중심에

열 달 동안 기적처럼 먹여 기른 흔적 고스란히 남아 있어

마음의 중심에

늘 살아 있는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