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詩앗 채송화의 ‘먼 산’
오랜만에 노꼬메 오름에 다녀왔다.
파란 하늘 아래
하얗게 쌓인 눈을 밟으며
벚꽃 핀 것 같이 상고대가 낀
겨울 나무를 보았다.
시심이 돋아나는 하루
더러는 나무가 떨어내는 눈을 맞으며
멀리 뛰어가는 노루를 보면서…
지난번에 읽다 둔
작은詩앗 채송화 동인의 시집 제12호
'먼 산'의 시와 같이 싣는다.
♧ 굶주림과 독수리* - 박정자
검은 폭염 등짝을 불사르는데
떨며 움츠리는 뼈마디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
엎드려 숨 고르는 아프리카 소녀
화들짝 놀라며 제 발에 미끄러지며
머리를 들이대며 저항하는 어린 진흙
등 뒤에서
기진한 살덩이의 최후를 기다리는
독수리 눈빛은 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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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빈 카터의 사진. 1994년 퓰리쳐상 수상. 캐빈은 이 사진 때문에 수상 3개월 뒤 자살했다.
♧ 선암사 가을 매화 - 소복수
오래 기다리다
차려놓은 상을 물리듯
꽃을 물리고
그렇게
잎을 물리고
옛 가지 그대로
차꽃 향기 스며들어
다 거둔 상에 새로 차린
가을 매화
차꽃으로부터
매화에게로
매화로부터
차꽃에게로
♧ 코끼리 그늘로부터 잔디 - 이제니
코끼리는 간다
들판을 지나 늪지대를 건너
왔던 곳을 향해 줄줄이 줄을 지어
가만가만 가다 보면 잔디도 밟겠지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가
발 아래 잔디도 그늘이 되겠지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
속으로 속으로 혼잣말을 하면서
나아갔다가 되돌아갔다가
코끼리는 간다
♧ 얼룩말 - 하린
철학자가 남긴 얼룩말 때문에 진눈깨비가 내린다
얼룩이면 얼룩이고 말이면 말이지
왜 얼룩말인가
목소리에 밑줄을 긋고
철학자가 남긴 마지막 명언을 씹어본다
역시 말의 고기는 질기다
하나의 얼룩이 또 하나의 얼룩과 엉킬 때
떼어낼 수 없는 피곤이 몰려든다
진눈깨비는 더 이상 어정쩡이 아니다
분명한 얼룩이다
♧ 종자 - 오은정
심을 것인가
먹을 것인가
봄이면 찾아오는 유혹
♧ 그 곳에 나를 두고 왔다 - 김길녀
당신,
문 앞에서
울고 싶은 날
가
끔
있
다
♧ 아스라이 - 나기철
죽은 감나무
너머
수樹평선
아래
무덤 하나
그 위
운雲평선
위
한라산 머리
아직은
아내와 둘
♧ 엄마 - 나혜경
몸의 중심에
열 달 동안 기적처럼 먹여 기른 흔적 고스란히 남아 있어
마음의 중심에
늘 살아 있는 단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