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열 시집 ‘빙의’와 명자꽃
저녁 때 친구 만나
막걸리 서너 잔 걸치고 왔는데
김수열 다섯 번째 시집 ‘빙의’가 와 있다.
뒤로부터 그냥 펼쳐 읽는데
더러는 ‘제주작가’나
무슨무슨 행사 때 접한 것들이고
안 읽었더라도 사연은 알만한 것들이다.
하도 재미있어
혼자 킥킥 웃으며 다 넘겨버렸다.
이렇게 무릎을 치며 순식간에
시집 한 권 읽어버리긴 처음이다.
블로그에나 올릴까 하여
엊그제 보았던 명자꽃과 올리려고 보니
무시무시한 글귀가 눈에 띈다.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재사용하려면
반드시 지은이와 실천문학사 양측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먼저 이 블로그에 올렸던 것도 있고,
우리 제주작가 카페에 올렸던 것도 있는데,
선전 차원에서 상업적이 아닌 그냥 블로그에
광고로 올리는 거니까 하면서도,
‘시집이 안 팔리면 어떡하나’
괜히 찝찝하기도 하다.
♧ 마라도에서
다섯 통의 전화를 받았다
세 통은 축하한다는 거고
나머지는 술 한잔하자는 거였다.
고맙다고 했고
지금은 마라도에서 유배 중이라 했다
배가 끊겨 섬이 가벼워지는 날이면
아낙들은 점당 백원짜리 고스톱을 치고
남정네들은 문어 삶아 술추렴을 한다
바쁘게 섬을 돌던 카트도 모처럼 주무시고 계시다
인터넷도 끊기고 에어컨도 돌아가지 않는다
내일이 백중인데 배가 끊겨 떡이 올 수 없다며
안 보살이 발을 동동 구른다
이번 부처님은 지지리도 먹을 복이 없나 보다
태풍 무이파가 몰려오던 날 어느 작가는
히말라야 산맥이 달려드는 것 같았다 했고
섬이 흔들려 심한 멀미를 느꼈다 했다
오후가 되자 바람끝이 점점 사나워지고
바다는 하얀 거품 드러내고 으르렁거린다
내일도
섬은 가벼워질 것 같다
♧ 긴한 말씀
긴히 할 말이 있으니
퇴근길에 꼭 들르라는 어머니
대체 무슨 일이냐고 되물으니
전화로는 말할 수 없다 하신다
위암이 재발해신가 아니면
아버지가 불편하신가
우풍 심한 어머니집에 들르니
우선 밥부터 먹으라며
안과 갔다가 꼬닥꼬닥 동문 시장에 갔는데
꿩마농이 하 싱싱해 한 단 사고
멜젓 조금 넣어 조물조물 파김치 담고
눈 맞은 배추 넣어 만든 콩국으로
저녁을 먹는데, 옆자리에 토다앉아 긴한 말씀 하신다
언치냑에 태레비 보난
는 거나 살진 거나
매 혼 가지렌 여라
봉다리 사탕 사다둠서
기리울 때마다 나썩 아먹으민
끊어지덴 여라
작산 것이 그거 나 못여?
지직게 끊어불라
알았수다 나오지 맙서
파김치 봉지 들고 달랑달랑
대문 밖 나서자마자 뒤 한 번 돌아보고는
담배 입에 물고 긴한 말씀 되새긴다
♧ 자리물회
여든 넘은 어머니가 쉰 넘은 아들 위해 해마다 자리철이면 자리물회 만드신다 말이 운동이지 바람 불면 휘청이는 몸으로 허청허청 동문시장에 가서, 보고 또 보고 고르고 또 골라 알 밴 자리 한 양푼 미나리 한 줌 양파 두 개 오이 두 개 깻잎 열 장 새우리 줌……
어느젠가 “자리물회 맨들아시매 왕 시원히 사발 라” 는 말에 안 가는 것도 그렇고 해서 가서 먹는데, “식당엣 것보다 맛 좋수다” 빈말로 한 마디 했는데 그 때부터 어머니는 해마다 자리철이면 시장에 가서 자리 사다 조선된장에 빙초산 넣고 조물조물 버무려 물회를 만드신다
앞으로 몇 년 더 만들지 모르지만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올해처럼 만들고 또 만들어 “자리물회 맨들아시매 왕 시원히 사발 라”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를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듣고 또 들었으면 하는 지나친 욕심을 부려보는 것이다
♧ 마지막 소망
이녁 발걸음으로 화장실 출입허당 오고생이 죽어지는 게 말년 늦복이렌 허영게 아이고 게메 느네 아방은 이미 글러부런신게 경해도 귀는 트연 뭐셴 고르문 고개도 끄덕허고 물 도렌도 허고 그것만도 어디라 더 아프지만 말앙 자는 듯이 죽어지믄 그것도 복이주 하루라도 나보다 먼저 죽어주는 것만도 큰 복이고말고
게나저나 나 죽을 때랑 나냥으로 화장실 출입허당 톡허게 죽어져사 헐 건디 경해사 느네덜이 덜 고생헐 건디 게메 경 해지카
♧ 어머님 말씀 - 김수열
-- 반레
네가 총을 겨누었을 때
네 앞의 모든 사람은 다 적이다
네가 총을 거두었을 때
네 앞의 모든 사람은 다 사랑이다
♧ 훌훌 털고 가라, 공철아
- 故 정공철 영전에 붙여
8월이면 민족극한마당이 제주에서 열리는데
경향각지에서 찾아들 딴따라들을 위해
그때까지 다부진 몸 만들어
막걸리 석 잔은 거뜬하게 비울 수 있게 하겠다더니
에라이, 야속한 사람아!
이 속절없는 사람아!
4·3굿이며 입춘굿은 누가 이어가라고
서천꽃밭 시왕질 이리도 서두르셨는가?
바당에서 노는 것들이 하나같이 안줏감이고
한라산 사무실 남은 술이 어서 오라 부르는데
피다만 담배꽁초가 재떨이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에라이, 야속한 사람아!
이 속절없는 사람아!
관덕정 마당에 카페리가 들면, 그땐
전국의 광대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아
천지가 개벽할 해방세상 대동세상 열두 당클 큰굿판을 벌이겠다던
그 다부진 약속은 어찌 되었는가, 이 사람아!
혈육 한 점 수정이만 남겨두고
왜 이리 서둘렀나, 무정한 이 사람아! 나쁜 이 사람아!
그러나 어쩌겠나?
이승에는 이승법이 있듯 저승에는 저승법이 있어
그 대 먼 길 떠나려 하니 붙잡지 않으려네
뒤돌아보지 말고 훌훌 털고 가시게
미운 정 고운 정 다 거두어 가시게
가서 부모님 찾아뵙고 대학 마쳤으니 곧
선생 할 거라고 거짓말했던 거 한 잔 따르면서 고백하시게
먼저 간 동생도 불러 두 일레 열나흘 못다 한 정도 함께 나누시게
이태 전 앞서 간 털보 최정완이도 불러 새로운 굿판을 도모하시게
이승과 저승이 서로 만나고
산 자와 죽은 자가 한데 어우러지는
신인동락 너른 세상에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으리니
공철이 이 사람아, 먼 길이라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먼 길이라네
돌아보지 말고 가시게
훌훌 털고 부디 잘 가시게, 내 친구 공철아, 이 사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