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은영의 봄 시편과 분홍매
♧ 새로운 봄을 기다리며 - (宵火)고은영
순장된 시간의 그래프들은 부활하지 않는다
이른 봄부터 늦은 여름까지
그리고 가을의 문턱에서 거룩한 행간 사이로
메마른 영혼이 울면서 가을이 갔다
다시 겨울의 깊은 심지를 돋우며
날카롭게 한파를 동반하는 동안
나는 날마다 슬픔이 육화되어
쓰러지는 것들을 보았다
단단한 믿음들이 자신의 변명에 바빠
슬그머니 꼬리를 감출 때
허상을 끌어안은 것들은
차디찬 변방의 영혼이었을 뿐
서글픈 현실에 이 찬란한 멀미중
나는 게워낼 수 있는 건 무엇이건 게워내고 싶다
이제 깊은 겨울에 헌시 되는 시편을 펼쳐들고
단단한 육질의 가슴을 일구고
다시는 다시는 울지 않겠다고
실존이 아닌 것들에 미련을 두지 않겠노라고
파리해지거나 여위는 의식들을 돌돌 말아 넣고
네가 아무리 날 벼랑 끝까지 밀어내도
나는 끈질긴 자생으로
지금은 상큼한 새 순이 돋고 있어
♧ 봄 속의 겨울
봄의 계정에도 과부하가 걸렸다
영원의 소실점은 어디인가
푸른 구름 유유한 저 하늘 끝자락인가
3월 하순 계절은 방향 감각을 잃고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거꾸로 돌고 있다
봄을 위해 눈뜨던 꽃잎들이
어제는 차가운 황사에 압사되어 혼절하고
오늘은 내리는 함박눈에 오금 저린 아픔을 씹는구나
삽시간에 형체 있는 것들을 허무는 눈송이들
고이 접은 허무가 하루하루 재생되어
풀 가동되는 순간에 아집으로 똘똘 뭉친 봄의 꿈들이
공 수레로 저 굵은 눈발에 파르르 떨고 있다
환장할 일이다
이상한 일이다
봄의 향연에 겨울은 가시지 않는 목마름에
굶주림의 허기로 사무치나
풀풀 날리는 눈발
가슴 아린 상처들이 새로 돋는 잎새에
욕창처럼 출몰하는구나
아무래도 지구는 병이 들었다
젊음이 장땡이 아니란 걸 깨달을 때쯤
삶에도 세월 묵은 녹이 슬고
버릇처럼 치매 같은 한기가 드는 오후
절기도 모르는 눈발이 흐드득 비음으로 내리고 있다
생명의 영지에 바람 쓸고 간 부위
새로운 표절로 일어서는 봄은 지금 어떤 음파로 떨고 있나
♧ 향기로 피는 봄
오후가 되고
메마른 정박으로 멈춰선 자리어도
젊음을 질투하지 말자
눈뜨면 보이지 않은 형상에도
연록의 봄은 사계의 서시로
맨 첫 땅을 딛고 오리니
점점 혈맥이 불거지는 밤은
이완되는 사고로 시달림에 지친 병고에
주검을 떠올리고 도마뱀처럼
제 꼬리를 자르는 고통에 겨워도
천지에 스미는 봄의 내음은
굳어가는 영혼에 향기로 피리니
♧ 흐드러지는 봄날의 행복
오늘은 촉촉한 날
어젯밤 오래된 내 꿈에 당신은 해일에 실려
연둣빛 당신의 노래는 햇살에 실려
연노랑 빛깔로 나풀나풀 휘파람을 불고
굳은 시어들이 조용한 공포로 날아다니던
지난겨울 모든 추위는 내 책임이라 고해하는 일기장에
당신 발걸음 소리 점점 가벼워지고
나의 머리칼에 윤기 흐르는 촉촉함이
아른아른 날개 다는 오늘은 아지랑이 같은 날
♧ 봄의 창
겨우내 가시적 고통은
짙은 아우라로 만성이 된
환멸과 추위에 온기를 그리게 했다
이 향긋한 흩날림 속의 발라드
설빙에 봉인됐던 색들이
고요히 눈 뜨고 있다
주검을 초월한 생명의 원조
그리고 무지개빛 사랑의 근원들
지독한 냉기를 뚫고 마법의 봉이
초록 성찬을 위한 번지점프를 꿈꾸고 있다
♧ 내 영혼의 봄날
저 먼먼 중생대 어디쯤 우리는
시조새로 만나 비익조로 진화하다가
어느 짧은 순간 온전한 하나가 되지 못하고
화석으로 굳어졌는지 모른다
산발한 머리에 후줄근한 모습으로 서서
빵을 먹던 스물일곱 어느 날 다가온
사랑을 만나 목숨을 버려도 좋을 만큼
뜨거운 열병이 들어 그리움과 보고픔의
눈물과 행복으로 찍어내던 발자국
그때 내 인생은 체리 핑크 베고니아 꽃잎이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겁없이 죽도록 사랑하여
하루종일 당신 이름만 헤아리다 잠이 든 꿈에는
긴긴 실어증으로 쓰고 아린 사랑이
바람에 펄럭거리며 지구 한 바퀴를 돌더니
버밀리온으로 번지던 다 알이라 가 되었다
내 몸을 열어 시린 영혼을 뽑고
진홍 피를 수혈하며 사랑을 숙성시켜
사랑의 고운 열매가 익어 수확하던 그때
상처도 눈물도 아픔도 고통도
오로지 태양을 품은 듯
미쁨으로 건너던 사랑을 향해
다소곳한 해바라기었다
♧ 빗물에 흐르는 봄을 읽는다
눈물이 나를 삼키던 때가 있었지
점점 피폐해지던 가슴에 끝도 없이 범람하던 ...
방황의 나날은 아프게도
내 영혼이 곁가지처럼 마르다가
세상과 어떤 소통도 불가능한
소망 없는 나루에 앉아
그래도 나는 행복한 꿈을 꾸었다네
생각해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 없어도
그 단단했던 겨울의 체기가 사라지고
도심의 세월에도 여린 음표로 주룩주룩
하루종일 봄을 재촉하는 비가 내리고
저 어둠으로부터 물이 오르는 희망이 눈뜨는 소리
오로지 아름다운 신념의 꽃물로 번질
황홀한 축제를 가슴에 그리며
지금 나는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향긋한 봄의 편지를 읽고 있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