섣달그믐에 보내는 변산바람꽃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이제는 익숙해져버림 나이 먹는 일이
심드렁하게만 느껴지진 않는다.
의지와는 다르게
점점 무기력해지려는 마음과
무거워지려는 몸.
양력이지만 올해 다른 쪽 백내장 수술을 했다.
원활히 공급되지 않는 눈물,
이제 오래 쓴 육체의 부분 부분에서
장애가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게을러지려는 몸을 추스르면서
봉사에 가까운 일들이지만
할 일이 많아진 것은
아직도 내가 할 일이 많다는 거다.
비록 내일 나이테가 하나
더 늘어나도 괜찮은 이유다.
♧ 섣달 그믐날 저녁에 생각나는 것은 - 박종영
매년 이맘때 섣달 그믐날 저녁이면
아버지는 가마솥에 물을 데어
우리 삼형제를 목욕시키고
물 부른 손톱과 발톱을 녹슨 가위로
물려받은 가난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정갈하게 씻고 닦아
보내는 시간과 다시 맞는 새해를
마음 가다듬고 소원 성취하라고
배불리 먹는 덕담까지 아끼지 않았다.
그때마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아버지의 세월은 눈가에 잔주름을 늘어만 가게 했고
한복 저고리 떼 묻은 동전 깃에서는
서러운 옛날 얘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어머니는 별것 차림세도 없이
비좁은 부엌에서 분주하게 손놀림하며,
지난봄 그 안개 서린 들녘에서 낭만을 외우며 갓 뜯어와
봄볕에 말린 취나물과 고사리나물을 데쳐 찬물에 얼리고,
옛날로 달려가는 바닷가가 그리운지 가슴이 하얗다.
초하루인 내일쯤에는
우리 가족 모두는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계곡물이 흐르고 따박솔이 촘촘히 자라선
하마터면 명당자리라고 불리는 운봉산 허리 자락,
나지막한 능선 따라 할아버지 할머니의 묘소에서
희망을 안고 성묘 차례를 지낸다.
기다려지는 이 그믐밤에
생각나는 풋풋한 이야기는 아무래도
붉게 타오르는 설날 아침에 들었으면 좋겠다.
♧ 섣달그믐에 - 송문헌
잊혀져가는 사람처럼 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섣달 늦은 밤 기우는 달빛에
선연한 너의 눈빛 또렷하구나
잊은 듯이 잊혀진 듯이
그래야 하는구나 그래야
얼마를 더 그래야 하느냐
흐르는 세월에 밀쳐 두고서
밤으로 잠 안 오는 날엔
눈을 감고 길을 떠나자
함께 했던 길 자욱 따라,
만나지 못한들 어떠랴
멀리 있으면 어떠랴
어디쯤서 어찌 살다간들 또 어떠랴
그리운 사람아
♧ 섣달그믐 날 - 서혜미
호롱불 아래
명주바지 저고리 밤새워 꿰매시고
숯불 다리미로 시간을 다린다
섣달 그믐날 잠자면
눈썹이 센다고
어린 딸에게 말하지만
철모르는 딸 그만 꿈속으로 빠진다
색동저고리에 코고무신 신고
하늘을 나는 어린 딸,
방긋 방긋 웃는다
윗목에 앉아 가래떡 썰고 있는
어머니 기침소리
문고리에 쩍쩍 달라붙어
쇳소리 내고 있다
♧ 섣달그믐 - 권옥희
앞선 아비의 등 뒤론 바다보다 더 깊은 어둠이 흐르고
속 끓이는 불덩이처럼 나는 종내 그 어둠 속에 혼을 놓고
말았다. 보이냐, 보이느냐며 애써 고향을 묻으며 손길 한
번 다가가지 못한 유년의 골짝마다 그리움만 무수히 별로
뜨는데 어둠은 어김없이 내 등을 일으켜 뭉텅뭉텅 잘려나
간 기억을 이어대다가 밤이슬로 부쉈다가 처음부터 내 혼
은 없었던 것 같아 누구도 부르지 못한 섬. 낯 익은 길을
열어도 하늘은 달마저 감춘 다 털어낸 벼포기의 밑동 같은
그믐밤을 내려놓았다.
섣달 어둠에 매달린 이리도 질긴 뿌리 어이 잘라낼거나.
아직도 바람같이 내달르고 있는 아득한 세월 너머 넉넉했
던 아비의 등짝 이미 간 곳 없고 넉살 좋은 심장처럼 굳은
가래떡을 썰며 나는 떡국 한 그릇도 목이 메어 넘길 수가
없는데 또 얼마나 많은 그리움들이 이 깜깜함 속에 가슴을
치고 있을지 보이냐, 보이느냐며 애써 몸을 일으키며 어둠
보다 더 깊은 해가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