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순진의 시와 살갈퀴꽃
♧ 벚꽃은 자꾸만 지고 외 5편 - 양순진
머리를 자른다
지천으로 벚꽃 피어나는 삼월
바람에 실려온 옛사랑 빙의憑衣
가슴 가득 흐르던 분홍빛 시간들이
천 길 낭떠러지로 뚝뚝 떨어진다
오랫동안 사랑을 잊고 있던 나무에게
찾아든 봄빛 사랑
부르면 달려가고
가라면 어두운 골목을 돌아
맥없이 돌아오곤 했다
그리우면 꽃잎편지 띄우며
달 뒤에 숨어 기다린 봄밤
머리카락이 허리춤에 흘러내릴 때까지
집 앞 가로등은 졸지 않았다
삼월이 떠난다
아픔이 수맥을 타고 뿌리에 닿는다
벚꽃은 자꾸만 지고
나는 머리를 자른다
♧ 각시투구꽃
검게 마른 섬 되어 바다 한 켠에 길게 누워 있었지요
한때 보랏빛 꽃 만발하던 섬
간간이 바람 어깨 어루만지고
파도가 졸음 깨워주기도 했지만
폐선의 조각들 떠밀려와 섬의 등 어지럽혔지요
태양이 비켜 가버린 음지
서서히 꽃들은 말라가고
오랜 비행에 어지러운 새들이
축축한 깃털 엮어 낮잠 자는 시간
바다에 잠겨 버린 해초의 귓바퀴
그저 파도의 몸짓에 따라 출렁이는 동안
그 리듬은 때로 칼바람 되기도 하고
하얀 햇살 되어 잘게 부서져도
그것이 인연의 원점이 되진 못했지요
차라리 종점이 가까워
해가 돌아가는 방향으로 몸 뒤척이며
짠 눈물 해풍에 말리는 동안
바다가 섬의 눈물이라는 걸 그때 알았지요
인장 없는 약속은 독으로 맺혀
점점 짙어지는 푸른 빛 멍으로
섬을 메웁니다
한 번 뒤척일 때마다 바다가 기침하는 밤
사방이 보랏빛으로 번집니다
그리움은 보랏빛을 띤다는 걸 꿈의 꽃이 일러주었지만
다시 한 번 해가 기울면
서쪽으로 떠난 유목민의 흔적
노을빛으로 섬 물들고
기억 잃은 물고기
섬의 깊은 잠에 천 년 만 년 잠겨
투구 벗은 꽃처럼 가벼워질 것입니다
♧ 홍어
죽어서도 웃겠습니다
7kg 밖에 안 되는 무게의 납작한 몸
보름달 뜰 때까지 삭혀 고스란히
저녁처럼 저물겠습니다
살아서 당신의 포구에서 행복했습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
날렵하게 가르던 물살이
이제 조용합니다
나의 허무가 때로
독한 향기로 당신 몸 속 전파된다면
나로 인해 푸르던 섬
영산포 달빛 끌어당기세요
밀물과 썰물 줄다리기에 둥글어진 검은 돌
영혼에 젖어드세요
죽어서도 웃겠습니다
살아서 누린 해풍과 별빛 고스란히 내 몸에
새기겠습니다
죽어서도 썩어서도 당신의 포구는
영원한 나의 밀항지
염부의 절대 가업처럼
푸른 바다는 생의 염전입니다
그 염전에 스며들어 삭힌 해풍
달빛 타고 노래하듯이
죽어서도 살겠습니다
♧ 붉은 밤
영화 [악마를 보았다]를 보는 밤
이병헌과 최민식의 잔혹한 광기의 대결
피를 보는 밤이 붉어진다
밤더위는 숨구멍 틀어막고
숨구멍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는 칼날처럼 섬뜩해
사이코패스가 사이코패스를 농락하는 밤
아시아는 아프리카는 유럽은 아플 만큼 아프다
기억해둬 더 끔찍해 질 테니까
毒은 毒을 알아보지 못해
자궁 없는 고양이 발톱은 능소화 줄기 위로 자라고
빗줄기 핏줄기로 내리는 밤
이마에 박힌 그 섬뜩한 문장은
사이코패스의 문신처럼 선명해
악마는 있다
네 가슴에 있다
우산 필 무렵 우산살이 먼저 빗줄기의 가슴 찌르듯
너는 사랑보다 먼저 악마다
밤고양이 눈이 되어버린 외계의,
아아, 그 섬뜩한 사랑의 배후
♧ 빗소리의 암호 1
사소한 외로움들이 물방울로 맺혀 내리는 게 비라고, 비는 허공에서 머뭇거리다 눈에 띤 맨드라미에게 젖어드는 거라고, 맨드라미는 슬픔이 터져 빨갛게 소리 지르는 중이라고, 어느 시인은 맨드라미 환몽에 익사하는, 그런 밤들
나는 읽다 만 시집의 표지에 43억 년 전의 빗방울들을 새기고 방금 읽은 시의 제목마저 잊어버리는 기억상실에 동요되고, 가장 오랜 빗소리는 당신의 키스, 안녕이란 말, 그 한 마디는 43억 년 전부터 내리던 비 같아, 속 쓰린 구토처럼 땅바닥에 외로움의 지도를 그리는, 그런 장마의 나날들
눅눅해지는 내면의 방에 맨드라미꽃이 피면 우스꽝스럽던 생애가 한 권의 책처럼 분명해질 것 같아 아직도 열 수 없는 당신의 창, 그렇게 빗소리에 갇혀버리네, 우리는 분명 한 순간 한 공간에서 소통하는 빗소리였어, 그것이 나를 변화시켰고, 당신은 분명 내 손을 잡아 주었어, 그것이 나를 맨드라미처럼 선명하게 버티게 해주던, 그런 꽃밤들
기억이 기억의 손목을 그으며 흥건하게 젖어드는 것이 비라고, 비는 허공에서 머뭇거리다 가장 흐린 창에 내려 앉아 기억의 등을 켜는 거라고,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가장 견디기 힘든 기억이 되어 발작 중이라고, 불면보다 더 끈질긴 반복적 그리움들이 비와 내통하며 새파랗게 질리는 중이라고,
♧ 새의 날개
당신이 아무리 뛰어난 기술로
옷을 짓고
집을 짓고
詩를 짓는다 해도
저기 허공 날아가는 새의 비행법
익히지는 못하지
눈과
손과
가슴이 하는 일
꽃 피고 지듯 이치가 뒤따르는 법이지만
한 숨 자유는
날갯짓 보폭은
공허 가르는 번뜩임은
몇 천 번 바위에 스윙하면서 피 흘린 댓가
저기 날아가는 새 앞에서
당신의 기교에 찬 화술로
농 걸지마라
시인의 옷은
천 번 만 번 어긋난 인연의 실타래로
촘촘히 메워진
새의 날개와도 같다
저 속도와 각도와 구부림의 체계는
빛과 어둠의 교차로에서
드러나는 법
가벼이 꺾이지 말고
기꺼이 새 되어 하늘을 비행하라
-시집 '자작나무 카페'(오감도, 2013년)'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