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5월호와 백작약

김창집 2015. 5. 6. 23:01

 

  우리詩 5월호가 나왔다. 칼럼은 임채우 시인이 썼고, ‘신작詩 13인 選’으론 김영호 송문헌 나병춘 박원혜 이규홍 도경희 이애정 김명희 이재부 임미리 박병대 강명수 이승예의 시를 올렸다. 특별기획 연재시는 여전히 홍해리 시인의 ‘치매행致梅行’을 열두 번째로 올렸다.

 

  기획연재로 싣는 이인평의 인물시詩도 어느덧 다섯 번째다. ‘시지 속 작은 시집’은 조경진의 시 8편과 이재부의 해설을, ‘테마가 있는 소시집’은 김정화의 시 10편과 시작 노트를, ‘시인이 읽는 시’는 김승기와 이동훈이 썼고, 조영임의 ‘한시한담’과 양선규의 ‘인문학 스프’도 계속 이어졌다.

 

  시 몇 편을 옮겨 요즘 간간히 보이는 백작약과 함께 싣는다.

   

 

♧ 크레이터 호수*(Crater Lake) - 김영호

 

오레곤 국립공원인 크레이터 호수

산정(山頂)위에 세워진 수신(水神)의 궁전이다.

8 킬로미터 폭에 천 삼백 미터의 수심

전 미국 호수 중 가장 깊은 산정(山井)이다.

이 호수의 백미는 그 신비한 물빛이다.

찬란한 보석 같은 물꽃들이 화원을 이룬 수궁(水宮),

푸른창공을 끊어 내려 비단요처럼 깔고 앉은

감청색 남청록빛 물의 요정들

사파이어 눈빛이 부시다.

나그네의 번뇌와 속정이 그 수중도원으로 들어가

황홀한 물꽃의 나비가 되어 난다.

태양이 보랏빛 그림물감을 찍어

세상을 천국으로 그려낸다.

호수를 껴안은 33마일의 둘레길

수많은 솔송나무 전나무들이 영가를 부른다

물속에 잠긴 옛 인디언들의 뼈를 달래는.

루핀 산꽃들 수장된 인디언 처녀들 얼굴로

침묵의 울음을 웃는다.

뿔사슴 엘크 떼들이 물을 마시는 호수 속

송어 떼들이 무지개꽃잎처럼 춤을 춘다.

오래전에 죽은 소나무 밑 송이버섯에서

인디언이 피우던 담배냄새가 나는 것은

어이된 일일까.

그 담배냄새에서 고향의 흙냄새가 나는 것은

어이된 일일까. ---시애틀 한국일보(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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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곤 중남부 해발 2천 미터위에 화산으로 형성된 호수.

 

 

♧ 나는 죄인이다 1 - 송문헌

 

광막한 어둠 바다를 멈춘 듯 건너가는

섣달 스무날 달이 홀로

뼛속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떨고 있다

 

차 소리도 멎은 골목 며칠째

소공원 담장 밑에서 시체처럼 웅크리고

꼼짝 않던 노숙자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어찌 되었을까? 나는 죄인이다

 

 

♧ 아직도 그 이별이 - 박원혜

 

옥상에서 본 거기

제일 먼 나라

슬픔은 견디는 것이고

길 가다가 갑자기 방황하는 것이고

자꾸만 뒤돌아보는 것이고

그리고 주저앉아

굵은 빗방울 같은 눈물 뚝뚝

떨어트리는 일이고

 

 

♧ 그런 적 있나요 - 이애정

 

황혼 무렵

바라보며 노래 불러본 적 있나요

일생을 두고

불었던 바람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노을을 보며

빈 나무 바라본 적 있나요

가지사이에 내려앉는

태양의 마지막 몸짓

그때 남은 삶을 그려본 적 있나요

그래서

아파본 적 또 있나요

소리 내는 울음보다

무표정한 자리가 더 슬펐던 것도

기억하나요

 

어느새

물이 스며오듯

어둠이 밀리는 때가 오면

세월이 나를 잊는 것

돌아본 적 있나요

…그래본 적 있나요…

 

 

♧ 화두話頭 - 홍해리

  -치매행致梅行. 111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나

 

하루 종일 붙잡고 매달렸지만

머릿속은 뿌옇기만 합니다

갈 곳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가 저물고 밤이 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을 찾아봅니다

별 하나하나에 등불을 걸어 놉니다

반짝이던 별이 금세 사라지고

하늘이 먹장구름으로 덮이고 맙니다

번개 치고

천둥 울고

비가 쏟아집니다

여기저기서 벼락을 때립니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 차가운 인연 - 조경진

 

바다가 바위섬을 안고 흔든다

두려운 마음 다잡고 따라나선 바다

아뜩하다

불안한 마음이 모자를 자꾸 눌러쓴다

순간 팽팽해지는

생과 생이 부딪혀 전해오는 전율

 

이승의 몫을 다 못했노라 퍼덕이는

낚시에 꿰인 물고기

동그란 눈이 나와 마주쳤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는 저 눈빛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지난해 요양병원에서 눈을 감지 못한

그녀의 눈을 감겨주다 가슴 터져

끝내 듣지 못한 그녀가 토해낸 말이

하얀 시트 위에 널려 있었다

 

한세상 사랑했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아마, 이 세상은 내 뜻이 아니라 했겠지?

그날도 햇살은 무섭게 내리꽂고

바람은 가만있지 않고 날을 세웠다

 

바다는 제 힘을 과시하듯

초라한 목선을 가만두지 않고 두드린다

뱃전을 붙잡고 있는 내 머리 위로

바닷새들이 맴을 돈다

하얀 배를 내놓고 뒤집어진 물고기를 바라보는데

하얀 시트 위 그녀가 누워 있다

 

그녀의 기일이 스쳐간다

죽음은 삶의 절정의 꽃이라고

내 가슴에 쏟아지는 한 줄기 소나기

 

 

♧ 연륜 - 김정화

 

1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아무도 보는 이는 없었지만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생각없이 힘껏 걷어찼다

돌부리는 그대로 있고

나는 내 발을 잡고 눈물을 질금거렸다

 

2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아무도 보는 이는 없었지만

안타깝고 후회스러웠다

한 걸음 뒤로하고 생각에 잠겼다

돌부리를 다독거리며

나는 부딪치기 싫은 것들에서 멀어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