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근 시집 ‘그날, 오늘 같은 날’
안상근 선생이 두 번째 시집을 냈다.
시집 이름이 ‘그날, 오늘 같은 날’이다.
‘현대시문학’으로 등단하여
첫 시집 ‘바람 사이로 흘러내리는 시간’을 냈었다.
‘나의 첫 시집에서 나온 타나토스의 독기를,
커피의 눈물처럼,
정화된 눈물로 떨어뜨리려 한다.
라르고의 속도이고 싶지만 그래도 몸에 달라붙은 알레그로가
나를 잡아
지금은 안단테의 어디쯤 있는 것 같다.
이제는 나와 대화를 시작할 때인가 보다.…’
라고 서문을 쓰고 있다.
시 몇 편을 골라
요즘 한창 피어나는
쪽동백 꽃과 같이 올린다.
♧ 배낭을 바꾸며
새 배낭으로 바꾸기 위해
지금까지 짊어졌던 배낭 속을 털었다
코펠도 있고 장갑도 나오고
라이터, 칼, 비닐 우의, 숟가락
화장지, 신문지, 비닐 끈, 볼펜
유통기한 지난 의약품 몇 종류
용도 모를 쇠붙이 몇 개
갈수록 내 배낭의 무거움에 일조를 했던 것들이다
이제는 비워야겠다, 툴툴 털고
내 새 배낭에는
모자, 선글라스 그리고 물병 하나면 된다
이 정도만 들어갈 작은 배낭이면 족하다
여기저기 눈물 같은 들꽃들이 아무도 모르게 피고 지듯이
고독하자, 그로부터 출발하자
살아 있는 한, 살아 있는 몸짓을 멈출 수 없을 때까지
♧ 촛불
끈끈한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가느다란 양초 한 상자를 사다 골방 구석에 뒹굴던 코발트빛 조개 모양의 사기그릇을 촛대로 받치다
자신의 눈물로 자신을 꼿꼿이 세우고 순간도 참지 못하여 양초가 온 몸을 태우며 깜박거린다 대낮이라 실체는 희미하지만 자기 존재를 드러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둠을 기다리는 애쓴 흔적이 땀으로 흘러내린다 숨막히는 고요가 몰려온다 촛불은 더욱 큰 혀를 내밀며 흔들어 적막의 의미를 장식한다
♧ 자화상
벗겨도 벗겨도 남아 있는 어리석음으로 연신 사과의 인사말을 입술에 달고 다녀야 하는 못나고 덜된 꼴을 오십이 넘는 나이에 이르기까지도 벗어 버리지 못하는 나 자신이기에
혹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 누구의 기분을 다치게 한 적은 없었을까 내 딴에는 제법 유머 감각을 살려 재치를 부린다고 한 것이 상대방에게는 오히려 폐가 되지는 않았을까 문득문득 두려운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이쪽에서 정말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오해나 질시의 비수를 맞아 가슴속 깊이 피 흘리며 아파하기도 하며 숨죽인 눈물을 흘리는 때가 가끔은 있다
그처럼 작든 크든 인간관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할 때면 예전의 나는 곧잘 바다로 갔었고 아니면 나 스스로를 유폐시켜 내 가슴의 불구덩이를 내 속으로 끌어들이곤 하였다
♧ 그냥 걸었어
학생들과 올레길을 걷는다
유난히도
발걸음이 가볍다
풀내음과 들꽃 향기가 내 뒤를 따라올 즈음
발밑 모래 알갱이 하나가 간지럽기 시작하더니
이내 찌르기까지 한다
간혹 기분 나쁜 통증이 전해지기도 했지만
신발 벗기가 귀찮아서
이 정도는 괜찮겠지 자위하며
털다보면 대열과 뒤떨어질 것 같아서
그냥 걸었어
에이 그냥 걸었어
까짓것 그냥 걸었어
그냥 그렇게 걷다
그 알갱이 하나가
발을 아리게 하고 결국은 물집으로 번져 중도 포기한 적이 있다
그리고 남은 건 엄지발가락 아래 티눈
그 때 그냥
툴툴 털 걸……
♧ 이렇듯 내리는 비는 맞을 때가 아름답다
아침녘 비를 맞고 살랑거리는 나뭇잎과 들풀에게서
초록이 튀어 나온다
폴폴 흙먼지를 주저앉히는 중천의 비에게서
용기와 안식을 읽는다
저물녘 떨어지는 비에 튕겨지는 물방울에게서
모차르트와 올챙이를 본다
들어와 누워 혼자 듣는 밤비에게서, 그 옛날
어머니의 지지는 소리를 듣는다
떨어져 뒹굴고
부서져 합쳐질지라도
천상에 있을 때보다 지상에 떨어질 때가 아름답다
이렇듯 내리는 비는 맞을 때가 더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