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의 소나무들
지난 일요일
삼릉으로 올라 금오산 정상을 거쳐
용장리로 내리는 길을 걸었다.
처음에 삼릉길로 들어섰는데
꼬불꼬불 구부러진 소나무들
20년 만에 왔다고
허리 굽혀 절을 하는 것만 같다.
더러는 수령이 백년은 넘은 것들이어서
오히려 내가 절을 해야 하는데도.
못 생긴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 했던가
삼릉을 두른 소나무 숲엔
제멋대로 자란 소나무들이
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과
소천면 일대의 산지에서 자란다는
쭉쭉 뻗은 춘양목보다 운치가 있다.
♧ 견훤의 잔으로 받아라 - 강남주
해가 이우는 경주 남산 산자락에는
소나무의 키가 쓸쓸하게 커 있었다.
포석정의 물은 이미 말랐고
산야를 뒤덮던 고함도 이미 멎고
하필이면 말없는 무덤만 외롭게 커 보였다.
칼 받던 호사로움을 생각하며
왕이여,
천년이 외로운 경애왕이여,
낙조에 물드는 이 한가로운 곳에서
흘러간 역사의 칼을
견훤의 잔으로 받아
그 술로 부끄러운 외로움을 헹구면 안될까.
그림자가 길어지는 남산의 하오는
그대의 역사처럼 짧아
더욱 쓸쓸해지고 있다.
♧ 경주 남산에 와서 - 유안진
묻노니 나머지 인생도
서리묻은 기러기 죽지에
북녘 바람길이라면
차라리
이 호젓한 산자락 어느 보살 곁에
때 이끼 다숩게 덮인
바위로나 잠들었으면
어느 훗날
나같이 세상을 춥게 하는 석공이 있어
아내까지 팽개치도록
돌에 미친 아사달같은
석수장이 사나이 있어
그의 더운 손바닥
내 몸을 스치거든
활옷 입은 신라녀로 깨어나고저.
♧ 禪마을 가는 길 - 이광석
처음에는 경주남산 석불, 천 년 잠 푸석 푸석 눈 부비는
기척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길섶에 누군가가 떨구고 간
화엄경 한 구절, 온 몸으로 적신 감포바다 파도소리도
묻혀 있었습니다. 밤마다 제 가슴에 적멸보궁을 짓는
노송들의 대팻질 소리는 미처 듣지도 못했습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듣고 싶은 재약산 바람소리는 너무 지쳐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합니다.
비록 눈이 내려 길이 막혀도 두렵지가 않습니다.
당신 곁에 다가서면 어떤 현란한 말(言)의 옷도
절로 벗겨집니다. 아 마침내 나의 안에 들어와
고뇌의 흰 옷을 벗는 아름다운 고요의 종소리여.
당신은 내 삶의 끄트머리에 서성거리던,
악성 종기 같은 탐욕을 쳐내는 묵언(默言)의
푸른 물살인 것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 산길을 돌다 - 나호열
- 삼릉 ↔ 포석정
가까운 길을
멀리 돌아가야 하는 것이네
삶과 죽음
한 뼘도 안 되는 거리를
많은 세월을 소모해야 하는 것처럼
한걸음에 달려갈 수 있는 그대 앞을
수 만 보를 터벅거리며 걸어야 하는 것
산길은 성급하게 서둘러서는 안되네
흘러온 시간만큼 거대해진 왕릉 옆에
안개를 매단 소나무 숲을 지나
바위마다 새겨진 마애불을 보면
누군지도 모를 천 년 전의 사람들이
합장하며 서 있고
누군가가 이 길을 먼저 즈려 밟았다는 놀라움이
소름으로 끼치는 일이네
그대를 향하여 가는 길이 어디 먼 곳에 있던가
문신처럼 마음속에 또아리 튼
물의 길, 바람의 길, 하늘의 길이 아니었던가
이제는 숨이 차다
그리움도 오래 걸으면 저렇게 풀섶에 주저앉아
한 시절을 달래는 쑥부쟁이가 되는 것을
다시 고갯길을 내려 잡으면
무거워진 등짐을 구름으로 날려 보내놓고도
발자국 소리는 텀벙텀벙 계곡 물에 빠지네
가까운 길을
왜 멀리 돌아가야 하는지
웃는 듯
우는 듯
천 년 전의 미소가 이정표로 서 있다
♧ 노욕 - 박남주
누가 뭐라 하든 개의치 않는다
양질의 자양분이며 수분을
뿌리 끝부터 힘껏 끌어올려
구부러질 대로 구부러지고
뒤틀어질 대로 뒤틀어져도
가지가 찢어져라
줄기가 부러져라
솔방울 주렁주렁 매달고 선
남산 소나무
한 그루
늙은 욕망의 구부러진 잔등에
군데군데 마른 버즘이 피어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