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그리며 물양귀비를
일기예보에
오늘 비가 내린다고 한다.
언제 제대로 비가 내렸는지
기억이 까마득하다.
연일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만치
비에 대한 갈망은 더욱 더하다.
7월 중부지방에 비가 많이 내린다고 해서
걱정을 하며 떠났던 경북지방 여행,
그러나 여행 중에도 비는 없었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태풍도 사라지고 비도 없었다.
그 뒤로도 한 보름쯤
비가 내리지 않고
연일 폭염에 열대야다 보니,
나무와 풀도 자기 색깔을 잃었고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지쳐 보인다.
이왕 내릴 거면
신나게 내려
더위에 찌든 모든 생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을진저!
♧ 여름비 - 오순화
물안개 젖어드는 거리에
머언 기억의 편린들이 빗방울 되어 내린다
아무 말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빗방울 수만큼
하늘만큼 사랑한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던 그대 향한 마음도
마른입술에 눈물만 고였었다
사랑해서 이별했다는 거짓말도
이별 후에 사랑인줄 알았다는 후회도
때로는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것
비오는 창가
비 내리는 저녁
비를 마시는 바다
바다는 비를 마셔도 마셔도 젖지 않고
슬픈 눈물꽃으로 피어나는 물안개만 가득해라
바다 건너에
채마밭 들녘에도
추적이는 거리에도
불타는 정렬
사랑에 울다 웃다 사라져간 내 젊은 날
사랑해서 이별했다는 말도
이별 후에 사랑인줄 알았다는 알 수 없는 얘기가
여름비 되어 내린다.
그때는 왜 가지 말라는 말을 못했을까
♧ 여름비 같은 너 - 架痕 김철현
지나치는 길손처럼 사랑도 그리움도 없이
얇은 옷깃 적시고 해 비칠 새라
짧은 꼬리 거두며 달아나는 여름비 같은 너
적셔진 마음만 애꿎은 애달픔에
뒤척여 잠 못 이루지만 갈라진 대지위로
숨어들듯 사라지는 너는 언제나 여름비
쉽게 왔다가 제 멋대로 사라지는
변덕스러운 너이지만 내 몸속에 들어와 앉아
떠나지 않는 익숙한 냄새가 아직도 너는 여름비
다시는 안 올 것처럼 남은 열정 쏟아 붓더니
수리도 못가서 돌아 설 것을 다 말리우지도 못한 몸을
재차 눈물로 얼룩지게 하는 너는 여전한 여름비
♧ 여름비 - 김설하
머그잔 가득 뽑은 묽은 커피가 쿨렁대도록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장대비가 내리자
투명 유리문을 메우고 허물며
빼곡하게 호러horror체를 쓰는 비의 낱말들
섬유 린스 냄새 폴폴 풍기는 커튼이 탐났을까
새로 장만한 인견 이불에 제멋대로 뒹굴고 싶은 걸까
낡은 벽지에 낙서라도 해볼 심산일까
그윽한 커피 향이 집안을 감돌고
창가에 기대어 비의 언어와 조율하는 한나절
필사적으로 담벼락을 기어오르던
담쟁이 푸른 잎맥이 부르르 떨자
조롱조롱 달렸던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져서
물비늘 일으키며 어디론가 흘러가는 길
봉숭아꽃 몇 잎도 동동 떠간다
우산 없이 뛰어가는 아이의 종아리가 찰방대고
제 발보다 큰 슬리퍼가 첨벙대는 골목
종일토록 비의 수다는 끊일 줄 모르고
정강이 당기도록 서성이며 엿듣는 하루
♧ 여름비 - 김덕성
오랜 기다림
추적거리며 비가 내린다
그만 지쳐 원망만 낳았는데
여름비가 내린다
보라 벌써
이 땅에 쌓였던 찌꺼기까지
말끔히 씻겨 흘러가고
들녘엔 과일들이
사랑으로 영글어가고 있구나
메마른 땅에도
목말라 헤매는 영혼에도
지금 정의로움으로
일어나고 변화의 물결
이 땅에
사랑의 생명수 되어
꿈을 실고
환희의 여름비가
촉촉이 내려 적신다.
♧ 8월 소나기 - 오보영
예기치 않게
불현 듯 찾아온 당신이라서
더욱 반갑네요
달아오른 열기
제대로 감당하지를 못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때맞추어 내달려와
뜨겁게 달구어진 몸 시원하게 식혀주니
얼마나 감사한 지요
어쩌면 그렇게 어려움 있을 때마다 살펴 아시고
얼른 다가와
심한 갈증 타오르는 목마름을 적절하게 해결해주는지
당신의 크신 사랑에
그저
고개가 숙여질 따름입니다
♧ 물양귀비 - 김승기
시궁창에 뒹굴어도
때 묻지 않는
천진무구
혹한 마음으로 다가갔는데
이슬방울 하나 붙지 않는
야박한 정
기가 질린다
야멸차고 뻔뻔한
저 오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진펄 속에서도
뽀송뽀송한 옷자락에 흐르는
소슬한 표정
건방지게 샛노란 웃음
소름이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