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로에 보는 으아리
지금 들판에 나가 걷다 보면
눈부시게 하얀 꽃무더기가
두드러져 보인다.
오랫동안 우리 주위에 있으면서
민간요법에서는 위령선이라는 약이 되어온 식물의 꽃,
그러나 독이 있어 잘못 사용하면
부작용이 아주 심하다.
오늘은 백로(白露),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한다는 24절기의 하나.
그 하얀 빛이 백로의 이미지와
딱 맞아 보인다.
♧ 백로 소묘 - 박인걸
정수리에서 맴돌던 태양이
건넌 마을위로 비켜가고
수척해진 능소화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태풍에 휘둘린 잡초는
세탁해 낸 빨래 같고
벌레에게 뜯긴 나뭇잎 마다
호흡곤란을 겪고 있다.
짙푸르던 미루나무는
담즙이 막혔나 황달을 앓고
꼿꼿하던 억세 풀도
제풀에 주저앉는다.
뭉게구름이 걸레질을 해서일까
하늘은 만년설 호수가 되고
쓰르라미 사라진 숲은
거룩한 고요가 흐른다.
텃밭 고추는 바람이 주물러 익히고
해바라기에 감긴 줄 콩을
가을 햇살이 어루만진다.
시멘트 화단의 사루비아가
가을 옷을 입고 맘껏 뽐내지만
내일 내릴 새벽이슬에
오들오들 떨까 걱정이다.
♧ 백로 절기에 - 박종영
여름 내내 지쳐있는 가슴을
솔솔 풍기는 가을꽃 향기로 채우면
기운찬 그대 웃음이 찾아와 달콤하다
그 향기 속에 마음을 담그면
반가운 웃음 환하게 솟아올라
가벼운 입술에 젖는 흥겨운 가을의 노래,
덩달아 청초한 바람으로 흔들리는 가을 산
포실한 구절초 향기 한 움큼 집어 올리고
산골 어디쯤 이별을 손 흔드는 억새꽃 서러워
성근 생각 추억으로 가져가면,
스스럼이 안기는 동그라미 얼굴 하나
산굽이 바람에 담아 빙글빙글 돌리면
그대 그리운 얼굴 풍덩 강물에 빠지고,
붉게 물드는 가을 나무 옷깃 추스르는
하얀 이슬 내리는 백로 절기 나무 그늘에서
쓸쓸한 내 옛날이 궁금하다.
♧ 백로(白露) - 장승진
올 여름은 무덥고 비가 많아
주먹만한 감자들이 다 썩었습니다
늦은 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별을 봅니다
여기는 외딴 동네라
별이 참 굵습니다
굵기만 한 것이 아니라
때글때글해서 좋습니다
썩지도 않고 매일 자라나는
희망을 꿈꿔 본 사람이라면
참으로 부러워할 밤의 꽃밭이예요
죽을 때 가슴에서 별이 쏟아지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면
부디 와서 보세요
밤새 별들이 슬어놓은
아침 햇살 속
때글때글한 이슬방울들도요.
♧ 꽃의 몸 달 뜨다 - 이가을
어긋나기 시작한 뼈들에 균열이 왔다 밤새 놓아주지 않는 통증 신열 가득한 이마 으아리꽃 수없이 까무러 졌다가 일어선다 먹장구름이 젖은 달의 얼굴을 가릴 때 꼭 그 때문에 통증이 덮쳐온 것은 아닐 텐데 몸 구석구석 통증의 흔적 역력하다 내 몸의 균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참을 수 없는 가려움들까지 붉은 점점이 발아하는 게 두견화 꽃씨 같아 어질 머리 내 몸에 새긴 꽃의 전문들 꽃의 말을 읽는다 길이 달랐던 입구 길을 잘못들은 뼈들 웅성거린다 소란스럽다
♧ 맑은 사람이 그립다 - 석란 허용회
맑은 사람이 그립다
눈빛이 샘물같고
가슴은 쪽빛 하늘 같아
사유의 풍향계가
실개천에서 노니는 중태기 같은 사람
맑은 사람을 보면
언제 어디서나 등이라도 치고지고
낙화유수처럼 순응하고 싶다
맑은 사람과
말을 섞고 몸을 비비면
몸속에 백열등이 켜진 듯
제육감까지 가득찬다
맑은 사람과
한 공간에 갇히면
그 옛날, 어느 초가을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던
은어의 수박 향 같은 신선함이
어느새 온몸에서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