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벌초길 고향 나들이

김창집 2015. 9. 14. 09:20

 

어제는 모처럼 팔월 초하루이자 일요일

모둠벌초를 하는 날이었다.

갓 해병대에서 예편한 든든한 조카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입도(入島) 선묘가 있는 덕지답으로 갔다.

 

그 옛날 당파에 엮여 어머님만 모시고

섬으로 피신하여 머물던 곳,

입도 1대(나의 12대) 할아버님 묘소는 50m쯤 떨어진 곳에

할머님 묘소를 거느리고 계신다.

 

4.3때 급박하게 마을을 성으로 두르면서

커다란 돌들을 모두 빼가버려

자꾸 허물어져버리는 산담에 앉아

으름덩굴과 사위질빵 줄기를 걷어낸다.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예초기 아래

드러나는 봉분을 바라보며,

언제면 자유롭게 무덤의 이전이 가능하게 되어

한라산 자락 해안동에 넓게 마련해놓은

번듯한 가족묘지에 묻히나 노심초사도 해보고….

 

벌초가 끝나 간단한 제물로 인사하고 나서

다시 어승생악 앞에 자리한 가족묘지로 옮겨

옛 고향 산천에 흩어져 있던

입도 2세부터 8세까지 무덤을 옮겨 놓은 곳,

뒤늦게 돌아가신 조상들과 즐비하게 누워계신

묘지에서 열 대도 넘는 예초기들을 분주히 돌려

11시경에 말끔하게 끝내고 간단한 차례를 지내고 나서

모두 절을 올리고 음복을 하면서

그간의 안부를 주고받는다.

 

 

다음은 각 마을별로 나뉘어져 있는

아직 그곳에 오기 직전의 무덤을 찾아

시골로 내려가 두 곳에 누워계신

입도 8~9세 조상의 벌초를 끝내고,

친척들과 모처럼 고향의 식당에 앉아 그간의 정담을 나누며

식사를 한다.

 

이제는 다른 사람이 사는 어렸을 적 집을 바라보며

코흘리며 다녔던 초등학교를 지날 때는

고향의 의미에 대해 생각도 했었다.

 

불충스럽게도 다음 일요일은

전례 없이 제주어 강의가 계획되는 바람에

고조부모님 이하 부모님까지 묻혀 있는 묘소 벌초에

불참하게 되어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 벌초 - 정군수

 

내일 모래가 추석

아버지는 나무손잡이가 달린

구식 머리기계로

아들의 머리를 깎으셨다

 

바람이 들어오는 헛청 그늘에서

왜정 때 썼다는 고물 기계로

밤송이 같던 아들의 머리를

팔월 박덩이 같이 깎아 놓으셨다

내일 모래가 추석

아버지 무덤에 가서 벌초를 한다

윙윙거리는 신형 예초기 칼날에

풀들이 바스라져 눕는다

 

달덩이 같은 무덤이 솟아올랐다

 

벌초가 끝나고

무덤가에 앉아 숨소리를 듣는다

하늘 어디쯤

아들의 머리를 깎고 계실

아버지의 낡은 기계소리를 듣는다

 

 

♧ 벌초 - 김종제

 

큰물 몇 차례 지나간 뒤

누워있는 아버지 위로

풀이 무성하게 자라났다

아버지가 억센 잡초에

포로가 되어 수풀 속에 갇히셨다

아버지가 함부로 돋아난 가시덩굴에

손발이 묶이셨다

불시에 아버지에게 뿌리를 내려

몸 갉아먹는 풀 베어버린다고

날 선 낫을 들었다

살 속 깊이 박혀 있어서

팔 한 번 휘두를 때마다

화들짝 놀라며 튀어나온 뼈가 앙상하다

아버지에게 달라붙어

피 빨아먹고 기생한 세월들이

낫질 한 번에

수북하게 무덤으로 쌓였다

언젠가 아버지의 단단한 城을 무너뜨리려고

나의 가슴에 불을 지른 적이 있었다

이제 봉분 같은 아버지 가슴에

활활 불을 지른다

아직 푸릇푸릇 살아있는 목숨이

온몸을 뒤틀면서 한 소리 하고 있다

변신한 생이 짙고 매워서

눈물이 마구 쏟아진다

길 막히기 전에 어서 떠나야 한다고

아버지의 남은 생을 마구 파헤쳤다

 

 

♧ 벌초 2 - 권오범

 

선산이 온통 에부수수해

면회와 정리해주기만을

이제나저제나 기다리셨을

고조부모 증조부모 조부모 아버님

 

떼가 솔가리에 찔려 아프다고 아우성쳐

꿈자리 뒤숭숭해 자반뒤집기하셨는지

죄송스럽게 푸석해진 봉분

기침들 하셨을까

 

태풍이 데려와 쥐어짰던 매지구름

조가비처럼 잘게 저며

켜켜이 널어놓은

하늘마저 기막힌 백로

 

으르렁대는 예초기 칼날 무서워

각자 비석 위로 피신해 계실 테지

조금 뒤 종이컵 가득

저승엔 없을 술 생각에 입맛 다시면서

 

 

♧ 벌초 - 이영균

 

높은 하늘 낮볕에 중만(衆巒) 해맑게 벗어지고

봉분에 사초기 음 요란하다

가위 소리 싹둑 귀밑머리 잘라내면

시원한 왼쪽 곁눈질 오른쪽이 미흡해 보인다

한 마디 훈수

가위를 불러 댄다. 갈퀴질 뗏장 위 사초를 긁어낼 때

머리 감기는 내내 정수리엔 손끝 느껴짐이 적다

두 마디 훈수

손톱의 할큄이 거칠어 보인다

피가 나도록 긁어야 떼가 잘 산단다.

 

맑은 거울 저 하늘 보면

말쑥한 얼굴을 하나 품고 있다.

기분 좋을 만큼 이죽거리며

지난해 갈걷이는 태풍 탓에 다 망조 나고

올해는 사초 공손하게 하였으니

대풍이게 하시려나.

가을볕에 붉게 익은 내 얼굴 닮아

하루해 서산에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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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만(衆巒): 많은 산봉우리

 

 

♧ 벌초(伐草) - 김안로

 

주인도 없는 산소에 소를 풀어놓고, 함께 메뚜기 잡던 여치다리 그 소녀는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요란한 선풍기 날개처럼 돌아가는 섬뜩한 저 칼날이 내 몸 어딘가를

덮칠지도 모르는 일이라서 나는 양손에다, 있는 힘을 다 모으고 쥘대를

운전해야 했다. 연장의 탈바꿈은 편해서 좋은 것도 있지만, 가끔 사람을 영

서툰 인물로 만들거든.

 

처서 지난여름 끝, 봄 가뭄 여름장마를 붙들고 억세게 웃자란 잡풀들이

문명의 칼끝에 난자되어 춤을 추고, 풀벌레들도 파도를 타는군. 그래,

오늘은 너희들도 이사하는 날. 조상의 뜨락에서 굴절된 햇살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중, 널부러진 잎새들이 태양빛에 배배 꼬여들고 있었다.

 

아직 짝짓기 덜 끝난 방아깨비 한 쌍이, 무겁게 내려오는 산그늘을 툭툭

떨어내고 있었다. 함께 놀던 그 소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 벌초(伐草) - 김경배

 

서투른 낫질로

지나간 시간 자르려니

더디기에

흐르는 땀방울로

날을 닦아

그리움을 베어낸다.

 

주름져 가는 손아귀로

한 움큼의 외로움을

움켜쥐고

연신 뽑아내면

불어터지는 한숨이

그 빈자리를 메우려 한다.

 

밋밋하게 드러난

봉분에서 추억 들추어내려니

벗긴 몸 파리하니

애처로워

초라한 상이나마 차리어

술 한 잔 따르고

세 번 나누어 권하며

음복으로 설움 덜어주는데

끝내 베지 못한

생풀을 남겨두고

돌아가야 하는 길

이승의 길이건만

너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