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비오름의 억새
오름 9기 13번째 강좌로 따라비오름에 올랐다. 마침 억새가 피어나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오름에 다니기 시작해서 얼마 안된 시기, 이 오름에 처음으로 올라 바라본 억새는 감동 그 자체였다. 햇빛에 반사되어 오름 사면에서 반짝이는 모습은 어렸을 적 그물에 걸려든 멸치들이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오늘 보는 억새의 흔들림도 그날 못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 광경을 보는 분들 역시 감동으로 받아낸다.
외떡잎식물 벼목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억새는 지금에 와서 대접받고 있지만 사실 과거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애물단지였다. 애써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놓은 중산간 밭에 이 질긴 억새가 곡식 사이에 끼어들면 단단히 박힌 뿌리를 해체하느라 한참동안 땀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무덤 봉분 위에 자라난 억새는 어떻고.
제주에서 ‘세’라고 부르는 초가지붕을 덮는 ‘띠’밭에 이 억새가 들어서기 시작하면 띠밭은 즉시 황폐해져버린다. 꼴밭도 마찬가지다. 지금 제주 땅 그 어디 황무지건, 돌밭이건, 바닷가건 가리지 않고 그 왕성한 생명력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지만 억새에게도 천적(天敵)은 있다. 그늘이다. 그늘을 싫어하는 억새는 자신보다 더 큰 나무속에 있을 때라야 스스로 침잠(沈潛)하게 되는 것이다.
♧ 따라비오름에서 물매화의 신음소리 엿듣다 - 김삼환
흉내낼 수 없는 품새
눈이 깊은 여인이여
흔들리는 억새들을 다숩게 끌어안고
첫차로 떠난 사람을
생각느냐 바람이여
하늘로 닿은 고요
가냘픈 선을 흐르는
키 작고 허리 가는 그 여인의 등 뒤에서
한 번쯤 벗어 보리니
내 의식의 가면이여
손 없는 날을 골라
그 여인을 안고 싶다
내 주위를 경계하는 안개 바람 울을 치고
물매화 가는 신음을
엿듣고야 말았느니
♧ 억새꽃 - 권경업
서그럭서그럭
흔들리는 너, 긴 사색(思索)의
배경(背景)이고 싶다, 나는
뉘 삶인들 다를까만
치밭목 무성하던 상수리 숲처럼
우여(紆餘)와 파란(波瀾), 서서히 줌 아웃 되는
모습 뒤의 그림자이고 싶다, 나는
한 드라마의 라스트 신에
오버랩 되는 추억이고 싶다
말없이 다가와 조용히 멀어지는 계절
회갈색(灰褐色) 풍경(風景) 속 여백(餘白)같은 사람아
차마, 우리 삶을 다 깨달았다 해도 쓸쓸할
쑥밭재 노을 걸리는 저물 녘
잔잔한 배경 음악의 조개골 물소리
나는 너의 그런 그리움이고 싶다, 사람아
아! 억새꽃 한아름같은 사람아
♧ 반짝이는 억새를 보며 - 제산 김대식
꽃이라 부르기엔
너무 하얗게 쉬어버린 백발
하얀 백발조차 그토록 윤이 나게 아름다운 건
억세도록 힘차게 살아온 생
아마도 그 억센 생명력 투지 때문이었을까?
불어오는 폭풍에도 굳건히 견뎌온 억센 끈질김
그 속에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백의 부드러움이 있었을 줄
♧ 억새꽃처럼 - 권도중
간절함 다스려 참아야 함을 압니다
억새꽃처럼 다 날려 보낸 지난날이
허물과 후회만 남긴 언덕으로 있습니다
다시 알리고픔을 용납할 수 있을까요
못 울린 북소리 숨기어 남겼어도 이제
세상에 넓은 어느 공간에 집 하나 있습니다
이제 젊고 늙음이 다름없는 사이인데
저쪽에 피어 생생한 세상에서 슬픈 꽃
이 죄업 그대 생각이 억새꽃 같습니다
♧ 억새 - 청하 권대욱
익숙하지 않은 길
홀로 창공을 헤맨다
섣달 초사흗날부터
놋쇠소리 내는
날 선 바람에도 굴복 않았던 육신이
삭막한 벌판에서
풀어헤친 오지랖은
낯선 계절의 여백을 버티고 있다
말없이 만들어준 메마른 세상 속
수줍은 온기라도 더하면
창백한 숨소리 고르는 나는
유연한 생존을 체험하고 있다
광야의 길 복판에 선
너처럼.
♧ 억새 풀 - 박인걸
억새는 칼날을 곤두세우고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며
잠 못 이루며 서걱 인다.
방황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며
빳빳한 마음가짐으로
영혼에 푸른 문신을 새기고
脫胎탈태를 다짐했건만
폭풍이 나무를 뽑던 밤
숲이 목 놓아 울 때
푸른 억새의 다짐은
하얀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그날부터 억새는
억세게 살기로 다짐했다.
바람에 흔들릴 지라도
꼬꾸라지지 않으며
산짐승에 짓밟힐지라도
쓰러지지 않으리라.
입에 문 예리한 칼날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낼지라도
검은 피를 내 뱉으며
짙푸른 옷에 풀을 먹이고 있다.
♧ 억새는 파도를 꿈꾼다 - 김정호
언제나 너는
아직 사랑할 수 있는 기쁨으로
세상을 울리는 눈물이 되고
따뜻한 목소리가 된다
음모처럼 낮은 수군거림은
비수처럼 밀려 왔다
가슴 한쪽만 지우고 돌아서고
날마다 출렁거리는 추억은
잎사귀 마디마다 햇살로 튀어 올라
물빛 그리움으로 쓰러지면
나는 또 밀려오는 네 소리에 잠든다
하얀 기억이 흔적 없이 부셔져도 좋다
세파에 멍든 가슴 씻겨내는
너는 잔잔한 파도 소리
오늘은
먼 수평선 한 끝을 당겨와
나를 허물고 지나가 다오
♧ 억새밭 - 김영천
-월출산
눈이 깊어지면
가슴도 그만큼 깊어지는 것일까
휑하니 멀어 푸르기만 한 하늘은
가슴 속으로 한 자백이나 들어 부어도
다 차지 않는다
이러할 때엔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웅성거리며
서로 악수를 하거나
이별 따위를 말하거나
더러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지만
아무렇게나 무리지어 흔들리는 것들의
저 웅대한 소리들은 무엇인가
저 심연 깊숙이 끓어오르는 함성들은 무엇인가
은근히 다가서 보면
어떤 사무침보다 더 간절히 불어가던 바람이
미리 그 흔들림 속에 묻히어
서로 서로의 가슴에 가슴을
포개고는
잣바듬히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