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따라비오름의 억새

김창집 2015. 10. 2. 21:31

 

  오름 9기 13번째 강좌로 따라비오름에 올랐다. 마침 억새가 피어나 세차게 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있다. 오름에 다니기 시작해서 얼마 안된 시기, 이 오름에 처음으로 올라 바라본 억새는 감동 그 자체였다. 햇빛에 반사되어 오름 사면에서 반짝이는 모습은 어렸을 적 그물에 걸려든 멸치들이 파닥거리는 것 같았다. 오늘 보는 억새의 흔들림도 그날 못지 않았다. 처음으로 이 광경을 보는 분들 역시 감동으로 받아낸다.

 

  외떡잎식물 벼목 벼과의 여러해살이풀인 억새는 지금에 와서 대접받고 있지만 사실 과거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애물단지였다. 애써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놓은 중산간 밭에 이 질긴 억새가 곡식 사이에 끼어들면 단단히 박힌 뿌리를 해체하느라 한참동안 땀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무덤 봉분 위에 자라난 억새는 어떻고.

 

  제주에서 ‘세’라고 부르는 초가지붕을 덮는 ‘띠’밭에 이 억새가 들어서기 시작하면 띠밭은 즉시 황폐해져버린다. 꼴밭도 마찬가지다. 지금 제주 땅 그 어디 황무지건, 돌밭이건, 바닷가건 가리지 않고 그 왕성한 생명력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지만 억새에게도 천적(天敵)은 있다. 그늘이다. 그늘을 싫어하는 억새는 자신보다 더 큰 나무속에 있을 때라야 스스로 침잠(沈潛)하게 되는 것이다.

   

 

♧ 따라비오름에서 물매화의 신음소리 엿듣다 - 김삼환

 

흉내낼 수 없는 품새

눈이 깊은 여인이여

 

흔들리는 억새들을 다숩게 끌어안고

 

첫차로 떠난 사람을

생각느냐 바람이여

 

하늘로 닿은 고요

가냘픈 선을 흐르는

 

키 작고 허리 가는 그 여인의 등 뒤에서

 

한 번쯤 벗어 보리니

내 의식의 가면이여

 

손 없는 날을 골라

그 여인을 안고 싶다

 

내 주위를 경계하는 안개 바람 울을 치고

 

물매화 가는 신음을

엿듣고야 말았느니

   

 

♧ 억새꽃 - 권경업

 

서그럭서그럭

흔들리는 너, 긴 사색(思索)의

배경(背景)이고 싶다, 나는

 

뉘 삶인들 다를까만

치밭목 무성하던 상수리 숲처럼

우여(紆餘)와 파란(波瀾), 서서히 줌 아웃 되는

모습 뒤의 그림자이고 싶다, 나는

한 드라마의 라스트 신에

오버랩 되는 추억이고 싶다

 

말없이 다가와 조용히 멀어지는 계절

회갈색(灰褐色) 풍경(風景) 속 여백(餘白)같은 사람아

차마, 우리 삶을 다 깨달았다 해도 쓸쓸할

쑥밭재 노을 걸리는 저물 녘

잔잔한 배경 음악의 조개골 물소리

나는 너의 그런 그리움이고 싶다, 사람아

 

아! 억새꽃 한아름같은 사람아

 

 

♧ 반짝이는 억새를 보며 - 제산 김대식

 

꽃이라 부르기엔

너무 하얗게 쉬어버린 백발

하얀 백발조차 그토록 윤이 나게 아름다운 건

억세도록 힘차게 살아온 생

아마도 그 억센 생명력 투지 때문이었을까?

불어오는 폭풍에도 굳건히 견뎌온 억센 끈질김

그 속에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백의 부드러움이 있었을 줄

   

 

♧ 억새꽃처럼 - 권도중

 

간절함 다스려 참아야 함을 압니다

억새꽃처럼 다 날려 보낸 지난날이

허물과 후회만 남긴 언덕으로 있습니다

 

다시 알리고픔을 용납할 수 있을까요

못 울린 북소리 숨기어 남겼어도 이제

세상에 넓은 어느 공간에 집 하나 있습니다

 

이제 젊고 늙음이 다름없는 사이인데

저쪽에 피어 생생한 세상에서 슬픈 꽃

이 죄업 그대 생각이 억새꽃 같습니다

   

 

♧ 억새 - 청하 권대욱

 

익숙하지 않은 길

홀로 창공을 헤맨다

 

섣달 초사흗날부터

놋쇠소리 내는

날 선 바람에도 굴복 않았던 육신이

삭막한 벌판에서

풀어헤친 오지랖은

낯선 계절의 여백을 버티고 있다

 

말없이 만들어준 메마른 세상 속

수줍은 온기라도 더하면

창백한 숨소리 고르는 나는

유연한 생존을 체험하고 있다

 

광야의 길 복판에 선

너처럼.  

 

 

♧ 억새 풀 - 박인걸

 

억새는 칼날을 곤두세우고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며

잠 못 이루며 서걱 인다.

방황의 세월을 거슬러 오르며

빳빳한 마음가짐으로

영혼에 푸른 문신을 새기고

脫胎탈태를 다짐했건만

폭풍이 나무를 뽑던 밤

숲이 목 놓아 울 때

푸른 억새의 다짐은

하얀 물거품으로 사라졌다.

그날부터 억새는

억세게 살기로 다짐했다.

바람에 흔들릴 지라도

꼬꾸라지지 않으며

산짐승에 짓밟힐지라도

쓰러지지 않으리라.

입에 문 예리한 칼날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낼지라도

검은 피를 내 뱉으며

짙푸른 옷에 풀을 먹이고 있다.

   

 

♧ 억새는 파도를 꿈꾼다 - 김정호

 

언제나 너는

아직 사랑할 수 있는 기쁨으로

세상을 울리는 눈물이 되고

따뜻한 목소리가 된다

음모처럼 낮은 수군거림은

비수처럼 밀려 왔다

가슴 한쪽만 지우고 돌아서고

날마다 출렁거리는 추억은

잎사귀 마디마다 햇살로 튀어 올라

물빛 그리움으로 쓰러지면

나는 또 밀려오는 네 소리에 잠든다

하얀 기억이 흔적 없이 부셔져도 좋다

세파에 멍든 가슴 씻겨내는

너는 잔잔한 파도 소리

오늘은

먼 수평선 한 끝을 당겨와

나를 허물고 지나가 다오

   

 

♧ 억새밭 - 김영천

   -월출산

 

눈이 깊어지면

가슴도 그만큼 깊어지는 것일까

휑하니 멀어 푸르기만 한 하늘은

가슴 속으로 한 자백이나 들어 부어도

다 차지 않는다

이러할 때엔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웅성거리며

서로 악수를 하거나

이별 따위를 말하거나

더러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지만

아무렇게나 무리지어 흔들리는 것들의

저 웅대한 소리들은 무엇인가

저 심연 깊숙이 끓어오르는 함성들은 무엇인가

 

은근히 다가서 보면

어떤 사무침보다 더 간절히 불어가던 바람이

미리 그 흔들림 속에 묻히어

서로 서로의 가슴에 가슴을

포개고는

 

잣바듬히 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