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상호 시집‘늦가을의 소묘’
후목 소상호 시인이
시집 ‘늦가을의 소묘’를 냈다.
‘초록빛 바람꽃’, ‘달빛에 오르다’,
‘파랑 물고기’, ‘꽃들의 기억’,
‘쟈스민과 보름달’에 이어
여섯 번째 시집으로 히람미디어에서 펴냈다.
시집에 나온 가을 시편을 골라
사진을 곁들인다.
♧ 시인의 말
어느덧 고엽의 계절이 돌아왔다.
벌레가 꿈꾸던 누런 시간의 흔적이
잎사귀 몇 개로 굴러왔다.
시집을 낸다는 일은 내게 있어
잎새들의 마지막 유언처럼 향긋하다.
아니, 쓸쓸하다.
그 형해 되지 않은 일을
나는 벌써 6번째 치르려고 하는 것이다.
딱히, 그 선악을 가릴 수 없는 언어들의 끝에서
내 존재가 꿈꾸려 했던
숨은 뜻과, 은밀한 사건을 도와주신 제인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추석을 보내며
-2015년 9월 30일
♧ 늦가을의 소묘
바람이 불어 아궁이 불을 지피는
옆집 소녀 같은 계절이 왔다
눈물이 연기에 휩싸여
저녁의 푸른 어스름을 놓치는 건 한순간이다
엄마를 부를까
부지깽이는 부엌의 불길을 헤쳐서야
저토록 검게 그을릴 수 있었을까
옆에 앉는다는 게 때론 그 소녀에게도
좋은 계절이 그의 가을을 가득 매웠던 날들이었다.
누군가 가을의 바람은 여미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감기를 물리칠 때마다
그 소녀는 더 가까이 다가와 있곤 하던 계절이다.
나 오늘 다시
그 계절의 소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조용히 날개를 펴고 남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가
더욱 기다려진다.
♧ 10월
10월은 어머니의 모습이다
오색이 蒼然한 산천
황금색 든든한 들녘
탐스러운 과실, 맛깔스런 열매
여름내 땀 흘리며 깁고 다듬어
우리에게 입혀주고 먹여주는 어머니의 사랑
눈을 들어 하늘을 보나
눈앞에 펼친 들녘을 보나
어머니의 慈愛가 널려있어
너무나 포근하며 안기고 싶다
주고 싶어 기다리던 날
뜬 눈으로 반기는 날
한없는 어머니의 性情에 가을바람이 앞선다.
♧ 가을 해산
까까중머리에 하얗게 분바른 낮달을 보면
벌써 입추가 지나고 백중(百中)이 다가오는 것을 안다
뜨거운 햇볕에도 녹지 않는
새털같이 부드러운 구름을 하늘에 걸고
이제 서서히 다가오는 가을을 만방에 알린다.
소슬(蕭瑟) 바람이 들어오도록
빗장을 풀어 젖히는 여름 사자(使者)
조용히 다가와도 좋으련만
열매를 낳으려는 몸부림으로
커다란 태풍을 몰고 오니
해마다 이맘쯤은 갈 해산에 큰 고통이 따른다.
해산을 맞은 날, 그렇게 울던 날이
누구를 위함인지
♧ 억새의 아픔
김영랑 시인의 피가 흐르고
갈매기 눈썹으로 시야가 넓어
마음이 시원하고 훵 뚫렸다
그러니 친구를 잠재울 수 있는
여유가 있을 것이다
남을 조심히 받들어
깨어지기 쉬운 유리병을 들고 있는 여자
차를 마시다 큰 눈이 부딪치면 놀라
가슴이 철렁하는
부산 해운대 바닷가에서 짠물을 먹고 자란
나이 보다 훨씬 성숙이 된 육적 풍의 여인
저면에 있는 죄의식을 끄집어내는 기술이 있어
가을에 핀 억새가 샛노랗게 고개를 들게 해
더 짠하고 추워 보이게 한다.
겨울이 되면 친구의 정이 더 그리워
물새의 깃이 주는 따뜻함을 보이면
차게 느끼는 물새
그 발의 아픔을 느끼는 겨울은
속 깊은 친구를 갖고 싶은 계절인지
♧ 가을의 소묘
바람이 불어 옆집 아궁이 불 지피는 소녀처럼
눈물이 연기에 차인 채
엄마를 불러 그 상황을 탈피하려는
부지깽이 같은 가벼운 마음
터벅머리 총각은 그 연기를 이기고
다가와 옆에 쭈그리고 앉는다.
가을의 바람은 여미는 것을 가르치는데
총각은 바지춤을 여미게 하고
처녀는 앞가슴을 여민다.
그리고 바람 불지 않는 곳으로 간다.
그래서 아담이 지난 번 보여주던 행동
그대로 복사하려다 지나간다.
가을은 오히려 여자의 날인지
여자가 추위를 타지 않아 여미지 않으려하여
에덴의 의미가 훨씬 더 깊숙이 나타난다.
어느 때는 향기가 나고
어떤 때는 연기가 폴폴 나
침을 흘리다,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 가을의 입상(立像) - 소상호
기억만 들쳐도 커피 냄새가 진동한다.
계절의 끝에 이르면 왜 먼저
기억을 끓이기 시작하는지
바람의 코끝에 단풍이 잠복하고 있다.
모두 잊어진 이야기는
전처럼 인화성,
사연을 따라 머무는 것을 안다.
연인이라는 것은
오래전 끝난 가을 화석이라는 것인지
그때마다 커피는 왜 노을의 입구에서 끓고
나의 간사함을 초라하게 하는지
그리고 몸을 도사리게 할 정도로
말이 많은 것은 세월이 쉬지 않고
물레방아를 돌리기 때문인지
세월의 그림자를
밟지도 못해
바라보고 울고 있기에 그러한지
나는 가을 하늘 속 별들의 노예가
되어 한없이 울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