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무렵의 늦단풍
어제는 소설(小雪) 아침인데도 비가 와
떨어져 널브러진 나뭇잎들이 젖은 채로
잎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 걸 보았다.
토요일 남송이오름 주변 곶자왈,
나무와 가시덤불 속에 가다오다 하나씩 박혀 있는 단풍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칙칙하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걸 보거나
사람들이 나이 드는 걸 보면,
모든 게 예전 같지가 않다.
지구 온난화여서 그런지
뜻하지 않은 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이외의 식물이 추위를 이기고 꽃 피운 것을 본다.
♧ 소설小雪 유감 - 임영준
걸맞지 않아서
사람 사는 세상인가
소설에 제대로 한번
눈가루 비친 적 있던가
들숨 크게 권한 적 있었나
그래도 사람들은 오가는데
기대하는 소식은 깜깜이고
음영만 짙게 깔린다
돌부리라도 차고 싶었는데
핑계가 생겼다
♧ 소설 - 권오범
가문의 번창 명받고
소모품으로 태어나
무성하게 경쟁한 추억
제각기 갈무리한 이파리들
이별이라도 섭섭찮도록
성깔대로 하나하나 끌어안고
불콰하게 뭉그적거리던
가을이 갔다
태곳적 약속 앞세워
매섭게 식식거리며
칼같이 들이닥친
동장군 콧김 무서워서
♧ 소설(小雪) - 최재환
방문 굳게 걸어 잠그면
추위도 밖에서 주춤거릴까.
결 고운 조약돌 하나
햇볕 따스한 石床석상에 올려
찻물 끓기를 기다리다.
돌려받은 세월이
삶을 앞지르기 전에
빈손으로 돌앉아도
하늘을 거역지 않고
밀린 빚이나 지워얄 텐데.
온갖 시름이 물속을 어지럽힐 때쯤
찻잔을 뎁히는 입김처럼
눈발이 가슴을 파고든다.
♧ 내장산 늦단풍 이야기 - 여울 김준기
말랑말랑말랑 만삭으로 익은 홍시
옷고름 풀어헤쳐
터질듯 쏟아질듯 풍만한 잎이여
이제 서릿발 가시로 돋아 올 텐데
차마 떠나지 못하여
오들거리며 떨고 있는 가을이여
날 벼린 삭풍 함께 오면
훌훌 타서 은빛 잿가루로
미리내 별강에 뿌려져 더 찬란할 단풍이여
이 가을 화려한 갈채에 손 흔들며
부끄러움도 함께 훌훌 벗어버린 나목裸木의 끝가지
귓바퀴 맴도는 갈잎의 속삭임이여
숲에서 계곡으로 쏟아져 웅성거리는
마침내 서래봉 넘어 무지개 흔들며 떠나는
그대 가을 낙엽들의 목쉰 함성이여!
♧ 늦가을 단풍 - 김경숙
하얀 햇볕 아래
나무들 잠재우고
무슨 말이 남았는지
뒤척이는 붉은 가슴
저물어 가는 산사
곱게 물들이며
떨치지 못해 붙잡은
마지막 남은 미련
♧ 내원사 계곡 - 하영
늦은 저녁답
내원사 계곡에 몸을 푼다
저녁예불을 막 끝낸 멧새 한 쌍
가벼운 날갯짓으로
반야교 건너, 해탈교 지나
오리나무숲으로 날아간다
붉은 색 선명한 단풍잎이
아직도 다리 난간을 붙잡고 있다
드디어 손을 놓고 물 위로 떨어진다
물길 따라
뱅그르르 맴돌더니
젖은 바위 붙잡고 안간힘 쓴다
그래 그런 것인지
사랑이 끝난 뒤에도 사랑의 눈빛으로
남고 싶은 것이지
아니다 아니다 하다가도
다시 마음 깊으면
향기로운 꽃으로 피어나기도 하지
상류 쪽에서
산천어 몸 씻는 소리 요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