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작가 가을호의 시와 상수리나무
지난 주말에 찾은 영천악과 칡오름
아직도 상수리나무 잎사귀가 곱다.
산북과 산남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기후
겨울 들면서 차이가 난다 할까
제주시에도 아직
가로수로 심은 느티나무 잎사귀가 조금 남아 있고
법원청사 옆 단풍나무는 노랗게 아직도 붉지 못하는
그 모습이 아직도 늙지 못하고 벤지롱게 꾸민
동네 70대 이모 같다.
12월도 딱 중간인데
아무래도 온난화 때문에 생긴
기후 이상 현상이다.
비 내리다 말다 하는 날 아침
아직 다 읽지 못해 접어두었던
제주작가 가을호를 꺼내 읽다가
시 몇 편을 골라
가을을 마감하듯 같이 올린다.
♧ 이누이트 소녀 - 현택훈
백야의 편의점
여름인데 긴팔 옷을 입은 소녀가 편의점에 들어왔다
지저분한 옷 햇볕에 그을린 얼굴 붉어
조그만 불덩이 같다
소녀가 까치발을 하고서
아이스크림 냉동고 속에 얼굴을 넣는다
드라이아이스처럼 서늘한 종아리 가늘다
어떤 것을 고를지 고심하는 소녀가
물고기 잡는 이누이트 소녀라면
오늘밤
순록을 타고 그린란드에 갈 수 있을까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휘감아도
아랑곳하지 않고
차가운 물고기를 잡는 너
어두운 골목길 모퉁이에서 마주친 적 있는 것 같아
네가 고르는 게 차가운 내일이라면
선택해야 할 얼음의 도시에 네가 있는 거라면
♧ 상사화 - 강봉수
곁에 있어도 그리운 이들이
다 잊혀진 줄 알았지
응달에 쪼그려 앉아
눈 밝히던 오후 네 시
세 사람 목숨 앚아간 총성
더 이상 없으리라 단언하며
봉개동 절물오름 내려오던 날
안개 묻힌 삼나무 숲길에
형체 그을린 수많은 원혼들이 줄지어
백비를 들고 가네
꽃대궁 설베 매고 가네
♧ 배지근 일 - 오영호
성님, 무신 지꺼진 일 이싱거 담쑤다
무사 나 얼굴에 경 씨어져시냐?
얼굴이 막 패와지게 보염싱게마씀.
기여, 배지근 일 있긴 있저
애기 어성 들아간다 들아간다 당
우리 큰며느리 애기 난.
게난 무슨 애기 났으광?
옌 여.
요샌 이 더 좋댄 헙디다.
남시민 아들도 나곡 도 나곡 테주.
♧ 감자 이삭줍기 - 한희정
흙은 아직 온기 남아
기다리는 손길 있다
이랑 경계 무너져도
네 자취는 분명하다
하얗게
꽃피던 그날 네 결백을 짐작했던,
묻혔던 네 실체는 벗겨진 살갗으로
진실을 증명하듯
뭉클하게 다가올 쯤
저만치
심지 올리는 꽃향유도 반갑다
♧ 콩 파종 - 장영춘
아뿔싸 사흘도 안 돼 까투리 배만 불린
술렁술렁 주인인 척 밭 구석을 맴돌며 수상한 검은 눈빛 그때 알아봤어야 했어
까투리 식구들 모여 아침조회 하던 날 먼 곳 뻐꾸기 소리에 취해있지만 않았어도
그들의 음모를 엿들을 수 있었는데 콩밭에 까만 똥들이 콩알처럼 뒹군 날
적선이라고 생각하기엔 약이 바짝 올라
어디서 나타나기만 해
푸른 눈만
굴렸다
♧ 깨를 볶다 - 이애자
톡 톡 톡
어디든 튀는 놈이 꼭 있더라
바닥인생 살아보면 그 뜨거움 알지 음-
볶다가 쥐어짜다가
그게 사는
맛이지
♧ 동강할미꽃 - 김진숙
그 무슨 절망 깊어
저 바위 뚫었을까
막장 속 피눈물도
꾹꾹 참은 멍투성이
묵은 잎
링거를 꽂고
지켜낸
세상
한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