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운앤율 제3호 ‘빛의 걸음을 따라’

김창집 2016. 1. 10. 17:41

 

아홉 사람의 시인들이

만나서 시를 이야기 하고

살아가는 정담을 나누는 모임인 

‘운앤율’이

2015년을 정리하는 시집

제3호 ‘빛의 걸음을 따라’를 냈다.

 

‘시 하나 부여잡고 내 살가운 영혼

끌어 담아 부대껴 볼 날이

이제 얼마나 더 허락될까?

쓰다 보면 소모되어 가벼워지는 게 세상사인데

우리네 삶은 왜 살수록 무거워지는지.’

에필로그의 일부분이다.

 

읽다가 내 임의로 시 한 편씩 옮겨

요즘 들어 더 빛을 발하는 자금우와 같이 올린다.

 

 

♧ 애월포구에서 - 송창선

 

바다는 힘겹고 고마운 삶의 터전이었지

하늘 가득 빛나던 별들 내려와

밤바다에 만개한 어화

마중하듯 뜬 눈으로 기다리는 포구의 불빛들

어느 어부의 좁은 방에도 그리운 별빛 돋을 무렵

 

애월, 한때는 은빛 물결 설레는 이름이었지

하물과 바다가 만나는 얕은 갯가를 지나

바닷가에 이르면 파도에 발 적시고

달빛 어린 바위 하나

그리운 이름 품었지

 

지금은 환한 조명 아래

테트라포스를 싣는 크레인과

바지선을 끄는 예인선이 토해낸 기계음에

환한 물속을 응시하던 두루미와 갈매기조차 뜸한

포구에 모래바람만 가파르다

   

 

♧ 혼자 먹는 밥 - 안상근

 

누군가가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국이 되고 반찬이 된다

 

당신의 얼굴만으로도 따뜻한 국이 되고

조곤조곤 얘기하는 그대의 말이 맛있는 반찬인 걸

 

혼자 먹는 밥에게

중얼대며,

 

가슴까지 타고 내려오는

끼니를 위해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후’ 불어 먼지를 털어버린 식탁에서

내 소리에 귀를 더듬고

네 손맛을 낚아채려 한다

 

겨울 그 깊이만큼 묻혀 있는 김장독처럼

혼자 먹는 밥은

‘싸’하다

 

 

 

♧ 무한대, 픽션 - 양민숙

 

펼쳐 나가는

초현실적인 공간*

 

캔버스 색채들이 온몸으로 퍼진다

툭툭 뿌려진 물방울이 환영을 만들고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도 내 모습을 만들어낸다

무형의 공기가 둥둥 떠 있는

또 다른 공간 안에

너와 내가 서 있다

 

네 모습을 더듬으며

하나씩

하나씩

치유의 시간을 생성하는

대담하게 탐닉하는

네 발자국을 따라 밟게 만드는

그 길 앞에 서게 만드는

 

너를 갖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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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 야요이 개인전 테마(본태박물관에서)

   

 

♧ 지는 꽃 1 - 이명혜

 

향기로나 남아있을까

 

텅 빈 집

홀로 피고지고

다시 피었을 꽃송이

 

겨우 마주한 순간

투욱

떨 어 지 는

 

내 어머니 마른 손목같은

목 메인 외로움

   

 

♧ 기억한다, 그날 - 이무자

 

기억한다, 그날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의 몸부림을

그러나 알지 못했다

왜 그렇게 흐느끼며 몸부림을 쳤는지

 

그리고

풀잎이 흔들릴 때마다 시퍼런 바다는

왜 그렇게 짜디짠 포말을 날렸는지

 

기억한다, 그날

바위에 부딪쳐 울부짖는 파도소리를

그러나 그땐 알지 못했다

왜 그렇게 소용돌이치며 부서져야 했는지

 

 

♧ 코스모스 - 이소영

 

까마득한 날부터

거기 서 있었을 것 같은 가을

기다림에 겨워 목 가늘어진 채

거리도 없이 다가와 손을 흔드네

 

서로 돌아서다 마주보며 부딪쳐도

그리움만 물결처럼 일렁여

무심한 척 지나가는 길손들에

그리움 하나씩 밝혀드는 가을 꽃등

 

거스를 수 없는 계절의 끝에서

그대 바람으로 와 나를 흔들다 가버려도

한 세상 그만한 등돌림쯤이야

 

사는 게 모두 바람 이는 파도라서

너 또한 이 땅의

한 때, 바람 같은 물결이구나

 

 

♧ 무학산 늦가을 - 장승심

 

시효 지난 비밀 통신인가

구멍 뚫린 떡갈 낙엽

 

온 산을 덮고 있구나

소식 무성하구나

 

자꾸만 가렵던 귓가

암호 풀린 가을 산

 

 

♧ 달의 노래 - 고성기

 

스스로 태울 수 없어

당신 주위만 돕니다

 

빛만 바라보는 사람

마주보면 암흑인데

 

기다려

등 뒤에 서면

아, 다 벗은 보름달

   

 

♧ 산수유 마을 - 권재효

 

그 마을에 머물기 시작한 날부터

수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뚝,

딱,

뚝딱,

뚝, 딱, 딱, 딱……

누가 도깨비방망일 두드리는지

그 소리 울릴 때마다

황금꽃을 터뜨리는 산수유나무

바람이 일 때마다

차르르 차르르

산수유나무에서 금싸라기 부딪는 소리

신이 났는지

방망이 소리 더 빨라지고

마을을 지나 이제 골짜기가 샛노랗다.

 

내가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

코고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방망이를 두드린 그가

드디어 일을 끝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