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앤율 제3호 ‘빛의 걸음을 따라’
아홉 사람의 시인들이
만나서 시를 이야기 하고
살아가는 정담을 나누는 모임인
‘운앤율’이
2015년을 정리하는 시집
제3호 ‘빛의 걸음을 따라’를 냈다.
‘시 하나 부여잡고 내 살가운 영혼
끌어 담아 부대껴 볼 날이
이제 얼마나 더 허락될까?
쓰다 보면 소모되어 가벼워지는 게 세상사인데
우리네 삶은 왜 살수록 무거워지는지.’
에필로그의 일부분이다.
읽다가 내 임의로 시 한 편씩 옮겨
요즘 들어 더 빛을 발하는 자금우와 같이 올린다.
♧ 애월포구에서 - 송창선
바다는 힘겹고 고마운 삶의 터전이었지
하늘 가득 빛나던 별들 내려와
밤바다에 만개한 어화
마중하듯 뜬 눈으로 기다리는 포구의 불빛들
어느 어부의 좁은 방에도 그리운 별빛 돋을 무렵
애월, 한때는 은빛 물결 설레는 이름이었지
하물과 바다가 만나는 얕은 갯가를 지나
바닷가에 이르면 파도에 발 적시고
달빛 어린 바위 하나
그리운 이름 품었지
지금은 환한 조명 아래
테트라포스를 싣는 크레인과
바지선을 끄는 예인선이 토해낸 기계음에
환한 물속을 응시하던 두루미와 갈매기조차 뜸한
포구에 모래바람만 가파르다
♧ 혼자 먹는 밥 - 안상근
누군가가 앞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국이 되고 반찬이 된다
당신의 얼굴만으로도 따뜻한 국이 되고
조곤조곤 얘기하는 그대의 말이 맛있는 반찬인 걸
혼자 먹는 밥에게
중얼대며,
가슴까지 타고 내려오는
끼니를 위해
허겁지겁 먹어 치운다
‘후’ 불어 먼지를 털어버린 식탁에서
내 소리에 귀를 더듬고
네 손맛을 낚아채려 한다
겨울 그 깊이만큼 묻혀 있는 김장독처럼
혼자 먹는 밥은
‘싸’하다
♧ 무한대, 픽션 - 양민숙
펼쳐 나가는
초현실적인 공간*
캔버스 색채들이 온몸으로 퍼진다
툭툭 뿌려진 물방울이 환영을 만들고
촘촘히 연결된 그물망도 내 모습을 만들어낸다
무형의 공기가 둥둥 떠 있는
또 다른 공간 안에
너와 내가 서 있다
네 모습을 더듬으며
하나씩
하나씩
치유의 시간을 생성하는
대담하게 탐닉하는
네 발자국을 따라 밟게 만드는
그 길 앞에 서게 만드는
너를 갖고 싶은
---
*쿠사마 야요이 개인전 테마(본태박물관에서)
♧ 지는 꽃 1 - 이명혜
향기로나 남아있을까
텅 빈 집
홀로 피고지고
다시 피었을 꽃송이
겨우 마주한 순간
투욱
떨 어 지 는
내 어머니 마른 손목같은
목 메인 외로움
♧ 기억한다, 그날 - 이무자
기억한다, 그날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의 몸부림을
그러나 알지 못했다
왜 그렇게 흐느끼며 몸부림을 쳤는지
그리고
풀잎이 흔들릴 때마다 시퍼런 바다는
왜 그렇게 짜디짠 포말을 날렸는지
기억한다, 그날
바위에 부딪쳐 울부짖는 파도소리를
그러나 그땐 알지 못했다
왜 그렇게 소용돌이치며 부서져야 했는지
♧ 코스모스 - 이소영
까마득한 날부터
거기 서 있었을 것 같은 가을
기다림에 겨워 목 가늘어진 채
거리도 없이 다가와 손을 흔드네
서로 돌아서다 마주보며 부딪쳐도
그리움만 물결처럼 일렁여
무심한 척 지나가는 길손들에
그리움 하나씩 밝혀드는 가을 꽃등
거스를 수 없는 계절의 끝에서
그대 바람으로 와 나를 흔들다 가버려도
한 세상 그만한 등돌림쯤이야
사는 게 모두 바람 이는 파도라서
너 또한 이 땅의
한 때, 바람 같은 물결이구나
♧ 무학산 늦가을 - 장승심
시효 지난 비밀 통신인가
구멍 뚫린 떡갈 낙엽
온 산을 덮고 있구나
소식 무성하구나
자꾸만 가렵던 귓가
암호 풀린 가을 산
♧ 달의 노래 - 고성기
스스로 태울 수 없어
당신 주위만 돕니다
빛만 바라보는 사람
마주보면 암흑인데
기다려
등 뒤에 서면
아, 다 벗은 보름달
♧ 산수유 마을 - 권재효
그 마을에 머물기 시작한 날부터
수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뚝,
딱,
뚝딱,
뚝, 딱, 딱, 딱……
누가 도깨비방망일 두드리는지
그 소리 울릴 때마다
황금꽃을 터뜨리는 산수유나무
바람이 일 때마다
차르르 차르르
산수유나무에서 금싸라기 부딪는 소리
신이 났는지
방망이 소리 더 빨라지고
마을을 지나 이제 골짜기가 샛노랗다.
내가 오솔길로 접어들었을 때
코고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며칠 동안 정신없이 방망이를 두드린 그가
드디어 일을 끝냈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