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흰동백꽃에 부침
새해 1월을 맞은지도 벌써 반이 지나갑니다.
그간 이틀의 시산제 참가를 제외하곤
한해를 다짐하는 날이 없었습니다.
새해에는 새롭게
많은 일들이 주어지고
그 일들에 보람을 느끼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하루하루 새로움 없이 살아왔네요.
앞으로라도 매일매일 새로운 마음으로
새롭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 땅에도
언제 들여왔는지 모르는 애기동백이
붉고 하얗게 피어 주변을 장식합니다.
겹동백도 흰꽃을 비롯 분홍, 빨강 등 요란하지요.
그 중에 토종 흰동백은 흔치 않은 우리 꽃입니다.
♧ 눈물 - 김종제
아침이었는지 낮이었는지 밤이었는지 흐린 어느 날 아버지와 어머니가 만나 흘린 눈물 한 방울 땅 위에 떨어진 씨앗이 되어 흙속을 파고 들어가 나무 한 그루로 나를 존재하게 하였다 내가 눈물로 만들어졌음을 알았다 살점 하나 뜯어내면 눈물의 홍수가 지고 눈물의 폭설이 지고 눈물의 강이 흐른다 그래서 봄에 내 몸에서 푸르게 돋아난 잎들도 눈물이라는 것을 그래서 여름에 눈물 가득 펼쳐 어두운 그늘을 만드는 것을 그래서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낙엽처럼 눈물 흩뿌리며 가는 것을 그래서 겨울에 눈물 얼어붙어 흰꽃을 피우는 것을 알았다 나와 한 번이라도 눈 마주친 것도 다 눈물이 되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알고 보니 마음 아파서 흘린 눈물이었다 저 붉은 꽃도 흰 꽃도 사실은 내가 흘린 눈물이었다 밤 하늘을 환하게 밝혀주는 저 달도 반짝이는 저 별도 내 눈물이었다 고귀한 너를 사랑하여 내가 눈물을 흘렸다 천한 나를 미워하여 네가 눈물을 흘렸다 언제나 내가 걸어가는 길은 눈물의 늪이었다
♧ 내 나이 마흔 넷의 흰 머리카락 - 서지월
마흔 네 해 동안 내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며
신발처럼 갈아버리는 것도 아닌 것이
참으로 수고 많았음은 분명한 일
그러나 보라, 그도 나를 따라 다니느라
내 나이 마흔 넷만큼 희끗희끗해졌네그려
이걸 어쩌면 좋지?
그처럼 더욱 정답게 가자는 것인가
아직 끓는 내 몸속 피의 순환처럼
멈추지 말고 흰 꽃송아리 바람에 날리는
흰꽃나무의 눈부심쯤으로
이곳에 앉거나 서서 바라보는 넉넉함
아마 그것일 게다
♧ 소금 - 강해림
시간의 수차(水車)는 돌고
뜨거운 뙤약볕 아래
바닷물은 제 살을 뒤집으며 말라간다
뒤집힐 때마다, 너무 오래인 묵은 피
한 점 남김없이 증발하는
저 쓰라림의 고해성사
수천수만 물의 뼈마디마다, 툭툭 피워내는
상처인 흰 꽃들
헛것인 듯 뿌려져 있는
만경창파, 저 응답 없는 메아리
어둠 속을
너무 오래 응시한
♧ 1월의 시 - 한택수
--햄릿의 독백 35
멀고 먼 별에
내 마음을 전합니다
만년설(萬年雪) 너머
아스라한 빛,
내 발걸음으론 다가갈 수 없는
천둥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아무것도 알 길 없는 그
누군가에 대해,
그가 남긴 삶의 요약(要約)을
별빛의 비유를
생각해봅니다
내게도 길은 없었다, 바퀴
자국을 남기며 산등성이를
넘었을 뿐, 이라고 적힌
크레바스에 갇혀서도
옷자락 끝을 잡은 이
달아오른
손을
기억하소서
♧ 1월 - 윤꽃님
나는 야누스
반은 감성에 살고 반은 이성에 산다
누가 이중의 얼굴을 탓하는가
순백의 물질, 눈 밑엔 언제나
질척한 진흙의 마음이 있는 것을
나는 야누스
반은 꿈에 살고 반은 현실에 산다
하지만 언제나 승리하는 건 현실
리얼리즘이 로맨티시즘을 능가하는가
자아가 본능을 억압하는 것을
나는 우화 속의 여우
그저 저 높이 매달린 잘 익은 포도송이를
시큼할 거라고 자위하며 지나가는
한 마리 여우
겨울과 봄의 길목에서
꿈인 그대여!
철학도 이성도 사그라드는
그대의 품속이여!
힘과 물질이 대단치 않은 곳,
개인과 자유의지가 피어나는
그대의 입속이여!
그대는 나의 아버지이자 아들
그대는 나의 자궁이자 혀
그대는 나의 과거이자 미래
어쩌면 이것이
그대가 눈부신 이유인 지도 모르는 것을
♧ 1월 - 주용일
서릿발 차면 하얗게 부서지는
수정 얼음들의 찬란한 스러짐 위로
낯익은 눈빛의 그대가 왔다
거리 두리번거리며 골목 기웃대며
눈가루에 희망의 이스트 섞어
새로운 양식을 마련하는 우리들,
불면의 머리 위로 첫눈처럼 다가왔다
까치 울음마다 한 땀 한 땀
세상 낡고 헐은 곳 기우며
뿌연 안개 헤치고 그대는 재림했다
안 보이는 찰나를 경계로
태양은 이미 어제의 태양이 아니고
사람은 벌써 지난 사람이 아니다
신의 형상을 본떠 사람이 지은
열두 궁궐 삼백육십다섯 칸
그 빈 칸 안에 우리들은
저마다의 소망과 기도를 쓴다
순백의 눈맞이 걸음 꾹꾹 눌러 찍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