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 그물에 걸린 모순
*배추꽃
'한라산문학 제28집'이 나왔다.
2015년을 마무리 짓는
동인 시 모음집이다.
이름 하여
‘권태 그물에 걸린 모순’
‘농부들의 심정으로 한 해 동안의
수확물을 오롯이 올려놓은 이책을
한라산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가슴으로 보냅니다.’ -‘여는 글’에서
시 몇 편을 골라
봄을 기다리는 들꽃과 함께 올린다.
*섬매발톱
♧ 서귀포 바다 - 강문신
서귀포 먼 바다가 목로주점까지 와서
두어 병 막소주 앞에
되려 말을 잃는다
섬 등대
새벽 길 밟는
생각 하나 적신다
*별꽃
♧ 마두금 - 김수열
고비사막의 저녁놀
낙타 눈썹에 바람이 고인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어미는
다가서면 물러서고
다가서면 돌아섰다
새끼의 입에서 단내가 났다
말의 머리가 구슬프게 울었다
해금보다 무겁게
가야금보다 두껍게 울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미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사막의 발등을 적신다
새끼를 받아들인다
어린 눈에도 반짝 빛이 난다
일터에서 허리를 다쳐
옴짝달싹 못하는 지아비 두고
몇 해째 소식이 없는 엄마
아무도 엄마를 위해 울지 않았는지
기다림에 지친 어린 딸의 눈물은
더 이상 짜지 않다
*광대나물
♧ 동굴의 역사歷史 - 김효선
꽃이 다녀갔다. 저 문장을 쓰면 동굴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시월의 모든 길은 당신에게로 뻗어 있다. 한 사람은 울고, 한 사람은 얼룩이 되었다. 고등어의 눈은 붉고, 순록의 피는 희다. 붉은 것과 흰 것의 뒤편, 발을 뻗으면 웃음은 한 평도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밤을 보냈다. 새벽은 퍽 친절하게 창문 하나를 내어 주었다. 새벽을 넘어 자연스럽게 흘러가 닿는 것은 이별이다. 끊을 수 없는 곡기처럼 다녀가신 당신,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 섬과 섬 사이, 종종 등 푸른 바람은 비리고, 흰 구름은 절반의 진실만 흘려보냈다. 발을 뻗으면 어둠의 뒤편, 허공에 새겨 넣은 그림자가 만져진다.
*서향
♧ 연꽃 같은 - 이윤승
누군가
찰나의 사랑을 영원으로 새겨놓은
연꽃 세 송이
뭍에서 이주해 왔습니다.
어디에 심을까
궁리를 하다가
거실 벽에 구덩이 파고 심었습니다.
아침이면
나보다 일찍 일어나
분홍색 립스틱 짙게 바르고
쿡쿡 웃음을 터뜨립니다.
무표정한 빛바랜 흰 벽이
이제야 진심이 통한 듯
마음의 빗장을 내리며 환해지는 아침
꽃밭에 뿌려 놓고 온
나의 뭍 추억도 언젠가
연꽃처럼 피어날 것입니다.
*큰구슬붕이
♧ 마지막 공양 - 김정희
아침 공양 풍경이 흔들리는 시간
선림사 대웅전 앞 연못에
날개 파닥이는 바람 왔다 갔는지
빗질된 도량이 경건한데
백팔 배 마치고 나온 잿빛 두루미 한 마리
연못에 마지막 공양처럼 누웠다
찬 겨울이 흘린 발자국처럼
혼자 떨어져 나온 날개는
길 재촉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연못을 덮고
밤 동안 날개 아래 숨 쉬는 것들의
따뜻한 겨울을 녹여주고는
빈 몸으로 하늘을 오른다
하늘에서 날개를 저을 때는
가벼운 바람으로 날았다
땅에 내려놓은 몸은
거대한 목탁처럼 도량을 흔들고
잠깐의 혼돈처럼
살아있는 것들은 합장으로
숨을 가둔다
*병아리꽃나무
♧ 나꽃 - 양전형
나도 꽃이지
이름은 ‘나꽃’
사람들 모두 ‘나꽃’이지
떨어질 때까지 피어 있으면서
지가 곱다고 난리들이지
꽃말은 ‘북망산의 회한’
자세히 보면
사람들도 다
다른 향기가 나긴 하지
*무꽃
♧ 그 방에서 - 김혜연
너를 기록했다
숨을 오래 참으며
빨개진 눈으로 빨아들였던
다음다음의 안녕安寧
잠들려면 취해야 했다
아침을 삼키고 늦은 오후를 토해내던
보증금이 필요 없던 벽의 자애慈愛
알고 싶지 않은 이국의 방언들이
참던 숨만큼 흘러나와 발목을 감싸던 복도
가난한 계좌 하나에
둘러붙은 독촉장들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던 방들
열렬히 달을 바라보았다
죽은 연기로 뱃속을 채워도
누런 동전처럼 반짝이던 눈동자들
진짜가 있었을까
함부로 펼쳐진 제본製本
그리고 동의 없이 소각된
그 방의 기록
*아그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