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양전형 시집 '꽃도 웁니다'의 꽃 시편

김창집 2016. 3. 16. 10:36

 

♧ 참꽃

 

어느 세계를 오래 다녀오면 이렇게

머리에서 발끝까지 봄빛으로 열리는가

간밤 왔던 선녀가 전한 말 있었는 듯

붉은 명주 조각조각 해맑게 두르고

슬쩍슬쩍 나만 보면 어찌하란 말인가

 

어떤 꿈 무시로 꾸고 있으면 이렇게

온몸이 수줍도록 벙글고야 마는가

바람도 설레어 콩닥콩닥 이 참꽃밭

물오른 내 외로움 층층이 밝혀놓고

올무로 나를 가두면 어쩌하란 말인가

 

 

 

♧ 금낭화

 

지상에 가득한 꽃들

저마다

제 가슴에 멍울 선 사람을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초여름

 

어둠이 차츰 쌓여가는 저녁

길들도 일제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고

수런거리던 꽃들도

눈꺼풀이 무거운데

 

저 혼자 누굴 기다리려는 듯

긴 잎자루

하늘을 받쳐 들고

야윈 발로 곧추 섰네

 

어둠을 휘휘

밀어내며

멍울 선 그 사람 길 잃을까

백열등 주렁주렁 달았네

   

 

♧ 사계리 해당화

 

너울지며

바람 이고 달려와

산산조각 부서지는 숙명 파도가

흐드러진 꽃무더기 보았는 듯

오늘따라 갈기 높이 세웠다

갯마을 해당화는

바람의 속내를 단숨에 읽는다

 

그렇게 수십 년

모래밭에 내린 꽃의 뿌리는

외로움만 무시로 밀어 올린다

 

외로움으로 피워 낸 꽃은

풀풀 나는 향기가 요요롭다

 

어느 바다에서 흘러온 바람도

이 향기를 비켜갈 수 없다

이 잠결의 꽃잎을

한 번씩 품고 나서

풀린 다리 휘청이며 풀숲에 스러진다

 

외로운 향기 흐드러진

사계리 해당화

몰려드는 바람 모두 품으며 산다

멀리 일렁이는 파도를 보며

가끔, 눈물 뚝뚝 떨구며 산다

   

 

♧ 별도봉 달맞이꽃

 

누군가 떠난 뱃길

제주 앞바다

길을 지운 수평선을 보다가

 

낮이 밤을 지우고

밤이 낮을 지우고

하루가 하루를 지우는 사이

노란 가슴 부풀다 터졌네

 

사랑 지우개는 깊은 잠인데

달빛 가득 내린 이슥한 밤

막막한 그리움이 잠마저 지우네

   

 

♧ 제주할미꽃

 

길들이 모두

한라산을 오르고

어디선가

멧비둘기 끅끅대는 어린 봄날

 

해마다 이맘때쯤

고사리 캐러 나섰던 할머니

오늘은 꽃으로 나왔다

들녘이 아직은 추운 듯

굽은 등에 털옷 걸쳐 입고

꽃줄기 끝 솜털 같은 목소리

땅을 향해 말한다

 

하르방,

그 쏘곱에도 봄이 완마씸?

재기 일어낭

식게에 쓸 고사리나 캐어둡서!

 

 

♧ 제주춘란

 

한라산 가장자리 곶자왈 속

흰 뿌리 사방으로 흘러내렸다

키스를 갓 끝낸 혓바닥처럼

불그레 감겨진 부끄러움

하늬바람이 할퀴는 산자락을 보며

가득 찼던 연민의 정

고개 숙여 펼쳐 놓았다

서민 닮은 소박한 마음

허공에 벋은 잎은 올차다

진하지 않은 향기로

봄을 품어 안았다

하고픈 말이 많은 듯

입이 달싹거린다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