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과꽃을 바라보며
길을 걷다가 분홍색 무더기가
언뜻 눈에 비쳐 다가가 본 즉
벌써 모과꽃이 피었다.
가녀린 분홍색 꽃이
동글동글한 잎 사이로 비죽이 목을 내밀고
수줍게 피어났다.
사실이지 노랗고 울퉁불퉁한 열매가
이런 작고 앙증맞은 분홍꽃에서 나온다는 게
도저히 상상이 안 간다.
꽃향기보다
열매 향기가 더 짙은 모과나무.
♧ 모과꽃 - 도종환
모과꽃처럼 살다 갔으면
꽃은 피는데
눈에 뜨일 듯 말 듯
벌은 가끔 오는 데
향기 나는 듯 마는 듯
모과꽃처럼 피다 갔으면
빛깔로 드러내고자
애쓰는 꽃 아니라
조금씩 지워지는 빛으로
나무 사이에 섞여서
바람하고나 살아서
있는 듯 없는 듯
♧ 못다한 말 - 최원정
모과꽃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이
맑은 시냇물 속을 헤엄치는
송사리처럼 투명하다
설운 맘 달래는 봄날의 오후
나의 은유는 모과꽃, 그곳에
♧ 모과꽃 - 김승기
천연두 마마를 앓듯이
겨울을 살아낸 삶
힘 넘치게
푸른 잎 틔우다
새잎마다 비늘 번득이면서
연홍색 꽃을 피우면
내 팔뚝에도 불끈 힘줄이 서다
맑은 영혼으로
햇살마다 실어 올리는 꽃향
덩치 큰 곰보의 얼굴이
오히려 예쁘다
여름 내내 정성으로 키우는 열매
그 달디 단 향이
가을을 듬뿍 적시면
하늘이 깜짝 놀라다
누가 너를 못난이라 하느냐
사람의 눈으로 자연을 들여다본다는 것
아주 조심스런 일이야
♧ 모과나무 - 권복례
서리가 하얗게 내리더니 늙은 모과나무에 애처로이 달려 있던 모과 한 알, 달력 숫자 위 어머니 칠순 날에 동그라미 하나 그리는데 뚝 떨어져 버렸다 ‘에미야, 한나네가 즈이 집으로 이사 간다는구나.’ 봄이면 늙은 모과나무에 수백 개의 하얀 비단꽃의 화려함도 잠시, 비바람 꽃샘추위에 의지하지 못하고 몇 개만 남아 모과알 키워내더니 밤새 설쳐 눈동자에 실핏줄 서게 하는 아열대 기후에 못 이겨 꼭지가 무르고 마르고 끝내 과육 맛 완숙시켜 주는 태양열 받아먹지도 못하고 떨어져 제 구실도 못하고, 모과 한 알 덩그라니 매달려 있다가 그 하나마져도 오늘 된서리에 못 이겨 뚝 떨어지면서 내 가슴을 친다
어머니 홀로 두고 육남매 저희들 둥지로 떠난 후에 어머니는 무엇으로 버팀목 만드시려나
♧ 당신의 초상 - 김영호
--비 맞는 나무
당신 눈 속에 모과꽃 한 송이
그 밑에 사내 하나 서 있습니다.
당신 눈썹 아래 그의 결린 허리를 지나가는
강물보다 부드러운 눈물이 보름달로 떠 있습니다.
갓 구워 나온 밀빵의 식탁이 놓여 있고
방금 내려온 모과가 익은 기도를 합니다.
깊은 눈길 끝의 별
그 푸른 종소리는 푸른 마을을 세우고,
당신 눈 속에
비 맞는 나무 비 맞고 있습니다.
가는 비가 더욱 굵어집니다.
♧ 그대 나 사이에 - 이정란
-모과와 잡초꽃
시골에서 캐다 심은 어린 모과나무가 겨울을 잘 못 건넌 듯
말문을 열지 않고 서 있는 옆에
잡초 한 그루가 파릇하게 얼굴 내밀었다
며칠 후 잡초는 모과나무 키를 훌쩍 넘더니
줄기 끝에 수십 송이 꽃을 피워 냈다
산수유 꿈결 같은 노란 화관
그곳에 봄이 요약되어 있는 듯해 어질한 순간
모과나무 가지의 검은 침묵이
잡초꽃에게 보내는 화사한 웃음이 보였다
봄날이라고 해야 비바람 부는 날이 더 많듯이
생명은 그래,
꽃으로 요약되지 않은 그늘이 더 환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