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오월 중순의 차밭

김창집 2016. 5. 16. 18:05



새 순이 곱게 돋아난 차밭을 보면

융단을 깐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보성에 차밭을 만들어

대단위 녹차를 재배해왔는데,

제주에서도 30여 년 전에 서광에 차밭을 일구고

지금은 ‘오설록’이라는 차 박물관까지 운영하면서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가까이 다가서 보면

참새 혀 같은 찻잎들이 오종종히

짹짹거릴 듯 솟은 어린잎부터

완연한 잎으로 펴지는 잎들이

우리 눈을 즐겁게 한다.

 

저것을 곱게 따서

정성스레 덖으면

고소한 향기가 나는 차가 되리라.

        

 

♧ 보성 녹차밭 향기 - 김윤자

 

여름 향기를 만나러 왔는데

첫사랑 여인을 찾아

녹차밭과 상록수 길을 거닐던

드라마 속의 한 남자

사랑의 향기를 만나러 왔는데

사람의 사랑보다 더 진한

차밭의 땀방울과

푸른 향기를 만난다.

이십 오년을 자식 기르듯

정성을 쏟은 재일교포의 손끝에서

해발 삼백 오십 미터 산기슭

아무도 돌보지 않던 볼모지 땅이

중국 용정차밭 못지않은 고고함으로

풍요가 넘실대고 있다.

산중 대한 다업 주식회사

전남 보성 녹차밭

희망은 빈터에서도 피어오른다고

하늘 향기를 읊조리고 있다.

곡우에 따는 우전차와 세작 종작 대작

천상의 옥향을 물들이고 있다.

        

 

♧ 보성 녹차밭 가는 길 - 김정호

 

그리운 이여

너로 인해 더 투명해진 오월

들꽃 향기 타고

푸른 들판을 달린다

산허리에 걸린 구름은

차창 밖으로 달려와 이내 사라지고

녹음도 지쳐 불길로 일어선 숲

바람에 눈뜬 새순은

어느새 하늘을 덮었다

 

네 게로 가는 길

굽은 마음 흔들려 넘치고

 

싱그러운 햇살에

푸른 향기 피어나는 녹차밭

산등마다 현기증 나도록 이어진

저 꿈의 계단을 오르면

 

또 어떤 세상이 보일까

        

 

♧ 녹차밭에서 - 김종제


꿈 일으켜 세운

삼백 예순 날 새벽마다

녹차밭으로 달려간다

여기 봇재 마루 아흔 아홉 구비

산비탈 이랑마다

서편제 창唱 소리 듣느라

허리 굽혀 귀 기울이는

키 큰 삼나무 발치 아래

절절이 애 끓는 가락이

늘 맑은 너

바로 송화가 아니었을까

사철 푸른 잎으로 소리 하느라

목청 녹 슬 일이 없겠다

어제 여름에는

너의 불길 같은 정수리에

열기 식히느라

찬 물 부어주었으니

오늘 겨울에는

너의 물길 같은 가슴 데우려고

뜨겁게 불 질러줄 테다

새의 혀보다 작은

너의 살갗이

장작으로 펄펄 끓어오른다

흙으로 만든 그릇에 가득 담고

계면조 같은 너의 향기 들어보면

세상천지는 어느새

폭설의 안개 속에 사라지고

나는 너의 눈을 멀게 만든

애비였을 뿐이다

한 소리 얻고자

폐가 같은 나를 일으켜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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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화 : 영화 서편제에 나오는 소리하는 여자 주인공

        

 

♧ 차향 - 사강 정윤칠


찻잎 대롱타고

찻물에 수영간다.

 

옴추렸던 온몸 펴고 따끈히 목욕하고

초록의 숨결 읽어 내려한다.

 

내 마음 둥둥

초록에 눕다.

 

살포시 내려온 선녀의 따스함

눈동자에 다가서면 학의 형상으로 돈다.

 

묵직한 찻잔

홀로 빙그레 웃고 가는 이 잡아 세우고

보는 이 불러 앉히고 마시는 이 취하게 하네.

 

섬에는 차나무 무수히

부서지고

 

황토 언덕에 무릉의 차밭이

바다더라.

 

맹물이 들어가 찻물이 되고

벗과 마시는 차는 초록으로 배를 채워갑니다.

 

수많은 만남의 줄거리

차 따는 처녀의 손에 반지는 초록의 띠

 

처녀의 손끝에 따진 연한 잎

차향에 멈추어 오는 이 가는 이 막아서는 향기

        

 

♧ 귀가(歸家) - 서경원

 

꽃잎들 격정의 몸짓으로 군무(群舞) 추던 봄

지친 날개 털며 숨 헐떡일 즈음

누가 위로해 줄까

창백한 수은등 불빛 의지하여 홀로 걷는

등 뒤의 원초적 고독을

 

열두 폭 치마 펼치며 내려앉은 어둠 사이로

젖은 꽃잎들 밟으며 간다

앞지르던 그림자 슬몃 옆으로 비껴 서면

성큼 다가서는 나무들

눈물이란 눈물은 이별할 때 다 흘려버린 걸까

고통보다 무거운 침묵으로 꽃잎 떨군 눈가에

피 빛 눈물 자욱 선연하다

언제던가, 고통의 계단 밟으며 오를수록

높다랗게 쌓이던 행복의 탑

 

어깨 짓누르는 삶의 무게에 눈떠 보면

양손에 들린 야채와 과일들의

저녁 식탁에 올려질 휴식과 행복

새벽 차밭에 피어오르는 푸른 안개처럼

가슴 두드려오는 새 생명들의 서약에

한 줄 시 오물거리며 둥지 찾아 깃을 접는

한 마리 휘파람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