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봉 주변을 감도는 안개
어제는 빗방울이 하나둘 날리는 날씨임에도
오름이 그리워 나온, 네 사람의 협의 끝에
한경면에 있는 당산봉으로 향했다.
당산봉은 바다에 면한 오름으로
'생이기정'이란 올레 12코스의 아름다운 길과
오름을 한 바퀴 도는 지질 트레일 코스가 겹치는 곳이다.
현장에 이르자 비가 조금 세어져
우산을 펼쳐 들고
자욱한 안개가 멀리 차귀섬을 감싼 모습을 바라보며
막 바닷가로 접어든 순간,
술패랭이 무리가 그 특유의 분홍으로 우릴 맞았다.
낚시하는 고즈넉한 풍경이나
바다를 배경으로 자라는 속칭 ‘방풍’이라 불리는 갯기름나물 꽃,
오름과 절벽에 면한 바닷가,
안개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섬들….
이 모두가 빗속에 카메라 든
나를 유혹하는 것들이다.
비는 여전히 맞기 좋을 만큼 내리고
그 비가 안개를 일으켜 분위기를 고즈넉하게 만든다.
지금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이곳을 오르고 내렸지만
안개 낀 이런 풍경은 처음이다.
♧ 안개, 그 박명(薄明)의 숨소리 - 박종영
첫새벽의 신처럼 하얀 가슴으로 숨어든다.
어느 때는 겸허한 침묵의 눈물로 낮게 흐르면서
그리움으로 간지럼타는 나무의 사랑을 엿듣기도 한다.
훌쩍 한 바퀴 산천을 돌아 와서도
아직 싱싱한 물방울로 보챈다.
으스대며 제 심장을 송두리째 꺼내 보이며
바로 채워지는 흔적을 잡아보라 한다.
그럴 때마다 갈 곳 잃은 작은 미소의 물방울들이
찬 기운으로 뭉쳐 높고 낮음이 없는 지평에서 나래를 편다.
이쯤 새벽은 안개의 평원을 거닐며 어떤 하루를 궁리할까?
강을 건너는 바람의 심술이 불어오기 전에
서둘러 사랑을 안기고 사라지는 아침 햇살을 담아올까?
부서지는 빛살 위에 밋밋한 웃음으로 퍼지는 안개꽃,
산비탈 망개나무 가시 얼굴에도
해송 그늘 받치고 핀 쑥부쟁이 마른 허리에도
모랫바람 눈물겨운 해국의 짓물린 가슴앓이에도
한 움큼 는개비 뿌리고 넘어가는 등 시린 세월,
그 박명(薄明)의 숨소리 들려오는 곳으로
안개는 비에 젖지 않는다, 언제나 젖어 있으므로
♧ 낙월도는 안개에 젖어 - 조성심
바다를 덮고
산을 덮고
하이얀 옷자락으로
섬을 감싸며
낮아지거라 낮아지거라
눈을 높이 들어도
헤쳐 나가려 몸부림쳐도
볼 수 있고
알 수 있는 건
안개 속에 모두 함께라는 것
멀어졌던 사람과 손을 잡아라
그의 눈망울을 들여다보고
서로의 속내를 알아내는 게
안개 밖의 세상을 아는 것보다
더 쉬운 일인 게야
♧ 안개 1 - 권도중
잘 보이지 않고 꿈속처럼 느낌이 옵니다
강서江西에 서 보면 강북江北은 아름답지요
이런 꿈 풀 수 있다면 피곤하지 않은 도시가 되겠지요
옛날엔 이 강변江邊 말 타고 달렸을
강구江口 마을이 불 켜고 깨어나기 시작하면
안개는 목마른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사라졌다가 못내 잊은 것 찾으러 오듯
강은 원래 갖고 싶은 꿈 꾸고 싶어서
혼자서 이룰 수 없는 꿈을 안개로 피우는 것 같습니다
♧ 새벽, 안개에 갇히다 - 이지엽
선명하게 읽을 수 있는 마음이란 없는가
길 위에서 길을 잃듯 생각을 하다 생각을 잃고
도저히 추측할 수 없는 곳에 닻을 내린다
그러기에 정박 중인 나의 낡은 배들은
쉼 없이 중얼거리며 출렁거려야 하리
죽음은 끊어진 섬처럼 갑자기 오리라
드디어는 네 중심에 이르렀다 확신했을 때
미끄러져 나가는 손, 이름이 지워지고
어느새 뜨거운 포옹도 물가로 밀려나와 있다
패총처럼 쌓이는 시간의 무덤을 향해
전조등을 켜고 더듬더듬 나아가는 生
흔들어 작별하기엔 산은 멀고 길은 젖어 있다
♧ 안개 속에서 - 박성숙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안개가 깔리고, 내 앞에는 아직 수습하지 못한 트럭의 짐칸이 안개를 싣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안개는 금방 사방을 덮어갑니다, 여자 몇몇이 안개 속을 나와 나를 지나쳐 다시 안개 속으로 사라집니다, 사라진 뒤에도 여자들의 웃음소리는 오래 들립니다, 아득한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 따라 걸어가지만, 나는 사라지지 않고 안개는 더 깊이 나를 가둡니다, 잠깐씩 나무와 차들이 모습을 보였다가 사라집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지만, 나는 나를 알아봅니다, 행운입니다, 이제 나에게 어울리는 미래를 맞추러 가야겠습니다, 아직 나는 서른 세 살입니다.
♧ 비안개 - 안영희
가거라
손을 놓고
돌아서지 못하는 그대
내 추억처럼 눈빛을 가려주마
멀어지는 것은 아름답다
흘러내리는 눈물
네 모습도 감춰주마
내가 산을 지우듯이
확연치 않은 것은 아름답다
주름 깊은 커튼이
모든 사물의 모서리를 뭉개고
용서하며 돌아 앉힐 때
한 장의 풍경으로 떠가는 이별
멀고 가까운 시간이 서로 엉긴다
크고 작은 등불로 번지며.
♧ 안개 - (宵火)고은영
목멘 세상
엷은 울음조차 삼키운
강기슭 절규
수치를 가리는 평안과 고독의
두려움 깊은 불투명 수채화
그 재색 휘장에
흑백 경계도 없이
사랑해야 할 모든 것은
혼돈으로 돌아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