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우리詩' 7월호의 시와 땅나리

김창집 2016. 7. 8. 02:24


장마전선이 한반도를 맴도는 요즘

이곳 제주는 연일 열대야다.

 

열두시가 넘어서도 기온은 수그러질 줄 몰라

그럴 때면 전전하며 잠을 설치기 일쑤다.

 

그래 아예 컴을 켜놓고 웹서핑을 하거나

옆에 쌓아둔 책을 이것저것 들추게 마련.

 

오늘 밤은 읽다 둔 우리’ 7월호의 시를 몇 수 옮겨

요즘 한창 대지를 달구고 있는 땅나리와 같이 올려 본다.

        

 

야구의 영혼에 씌다 - 이동훈

 

잠결에 야구의 영혼*이 들어오지.

자리에서 쓱 일어나

내복 유니폼으로 방문을 나가지.

창밖은 꺼질 줄 모르는 광고판 조명.

새시 문엔 얼비치는 내 모습은

왼 다리를 천천히 올리지.

몸을 바로 세워 균형을 잡고 던지기 자세로 들어가지.

왼팔은 던지는 방향으로 두고

오른팔은 엉덩이 뒤로 뺐다가 어깨 위로 넘어오지.

디딤 발로 몸의 중심을 옮기며

공 던지는 시늉을 하는 거지.

상대가 없으니 싱겁긴 해도 참 열심이지.

몸이 풀린 야구의 영혼은

왼 다리를 더 높이 치켜 올리지.

몸을 뒤로 꼬았다가 풀면서 가슴을 내밀지.

팔 회전을 크게 하고 손목 스냅으로 채면서

그 쏠리는 힘으로, 전력으로 날아가는 거지.

그렇게 나를 던졌으면

넌 절대 나를 맞추지 못했을 테지.

꼼짝없이 맞아 날아갈 거였다면

한번쯤 저 광고판에 작렬하여 불꽃으로 터졌으면 싶지.

이 밤도 몸을 풀다가

스르르 빠져나가는 야구의 영혼.

자면서도 손바닥을 둥글게 마는 것은

폭포수처럼 꺾이는 마구를 익히려는 거지.

너에게 나를 소리치고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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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철의 시, <야구의 영혼>에서 빌림.

        

 

백일홍 - 이혜수

 

백 일 동안의 치명적 사랑

 

꽃구렁,

산 하늘이

꽃그늘에 무너진다.

 

핏빛 그리움

그대 하늘

심장에 혼불로 타오른다

        

 

 

그의 이름은 김철식 - 마신숙

 

그는 연극판 쫓아다니다

무대 한 번 못 서고

포스터만 붙이다가

변두리에서 세탁소 한다

 

아파트 돌며 세탁 세탁이라는 말 대신

드라이 드라이 한다

 

사람들이 왜 세탁이라고 안 해요 하면

돈세탁은 안 해요 하고 미련스럽게 입을 꾹 다문다

 

일이 끝나면

비듬 앉은 대머리 가발 쓰고

아랫니 빠진 데 면봉 끼우고

방 가운데 찬물처럼 앉아

<고도를 기다리며>의 주인공을 엄숙하게 연기한다

 

미래에 뜨겁게 팔려나갈

대배우가 될 것을 믿으며

누군가 구원의 밧줄이라도 내려줄 듯

끈질기게 기다리다 꾸벅구벅 존다

 

그의 구애를 걷어찬 여인이

꽃다발 바치는 상상에 미소 짓기도 하다가

쓰레기처럼 쌓인 세탁물에

코를 박고 꼬꾸라진다

 

그는 눈을 뜨고 싶지 않다

잠 속에서는 배우이기 때문이다

    

 

 

폭우, 그 끝 - 조성례

 

주방에서 무심코 과일을 깎는데

거실, 그녀의 등 뒤로 도랑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머니가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시나보다

주름진 저 손안에서 흘러나오는 긴 소리의 끈들

산골 작은 도랑의 얼음을 껍질처럼 과도로 벗겨내면

샘물의 속살에서도 저런 소리가 날까?

 

칠월, 태양이 숨은 잿빛 허공 어디쯤

구름들의 모서리에서 뛰어내린 이슬비가 폭우로 변하던

어느 여름의 우기였을 것이다,

산골도랑의 바위를 굴리고 화전 밭을 뭉개고

산 아래 마을을 초토화 시켰던 폭우도,

그랬다 붉은 울음들이 삼키고 떠난 자리들은 모두

길 아닌 길을 허옇게 포태하고 있었다

오래전 그녀의 사내가 저녁밥상을 내던지듯

골절된 세상의 꿈들을 부셔버렸을 때도

어머니, 그녀의 가슴 안쪽으로 붉은 물이 범람했었다

 

맥없이 뿌리 뽑힌 계절도 요실금에 걸린 하늘도

상처 입은 것들 모두를 안쓰럽게 끌어안고 이제껏 살아온

저 고요한 뒷모습은, 얼마나 무수한 체념들을 안으로 삼킨 것일까

어머니는 오늘도 여전히 콩나물시루에 물을 주시고

밖은 어느 새 찬바람 부는 시월,

 

나는 붉게 익은 사과 속 단물이 그리워 다시 과도를 든다

문득, 껍질이 잘려나간 속살마다

노모의 침묵이 벌레처럼 웅크린 채 쓸쓸히 돌아누워 있다

        

 

시냇가에서 - 전선용

 

오뉴월 수양버들처럼 머리 떨구고

무얼 그리 보는가

자벌레 오체투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기어가는 거였어, 시냇물이

사는 게 그런 거라고 말하더군

유유자적 고추잠자리

세상을 넓게 보는 눈을 가졌지

잡아챌 틈도 주지 않고 도망가 버렸어

꽃도 내가 손을 내밀면 고개를 돌리더라고

바윗돌쯤 아무것도 아닌 양

밀쳐내며 저리 기어가는데

무릎을 탁 쳤어

저놈이 저렇게 강이 되고 이윽고

바다가 되는 걸

졸졸졸

가는 길이 아팠던 거야

그래서 천천히 울며 가는 거였어.

        

 

찔레꽃 - 수영

 

다음 생애는 당신보다 늦은 계절에

꽃으로 피어 지나가는 당신을 불러

세우리

 

당신이 겨울일 때 나는 봄이어서 하얀

찔레꽃으로 말을 걸어 보리

 

꽃으로 잎으로도 당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향기로 전생의 기억을 불러주리

 

당신과 눈빛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면 한철

봄꽃으로 피었다 진다 해도 서럽지 않으리

        

 

생활의 발견 - 김수상

 

   냉장고가 운다 내일이 입춘이라는데 한밤에 혼자 깨어 냉장고가 울고 있다 반쯤 남은 소주병이 울고 젖은 시래기가 울고 아버지가 먹다 남기고 간 간처녑도 벌겋게 울고 있다 운다 내일이면 입춘이라는데 냉장고가 울고 있다 냉장고 옆에 걸린 달력도 울고 설날 벌건 연휴의 숫자도 울고 있다 식탁의 숟가락도 울고 싱크대의 수세미도 울고 있다 봄이 오면 어쩔거나 꽃이 피면 또 어쩔거나 비가 온다 비는 와서 운다 생활이 운다 무서운 생활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