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 못한 '이정록, 한여름 밤의 시식회'
엊저녁
조천에 있는 카페 ‘시인의 집’에서
손세실리아 시인이 진행하고,
이정록 시인과 함께 하는
‘한여름 밤의 詩食會’에 꼭 가보려 했는데
이런 저런 사정으로 못 가고 말았다
갔으면 여러 문우들과
한여름 밤을 뜻깊게 보냈을 텐데.
다른 모임에 갔다 돌아와
주섬주섬 그의 시를 찾아 읽다가
몇 편 옮겨
단풍나무 시과(翅果)와 함께 올려본다.
♧ 하산 - 이정록
산이 깊었다 지름길을 찾아 허둥댈 때마다 길은 사라졌다 헤매는 일은 언제나 지름길 위에서이다 후회는 깜깜하다 마음이 오금다리처럼 접힌다 주저앉은 자리에 너른 바위가 있었다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순간에도 궁둥이 들이밀 자리를 쓸어냈다 새똥과 낙엽을 거둬냈다 거기에 며칠 안 된 라면가닥이 있었다 꼬불꼬불한 인사가 있었다 사람만이 라면을 지고 다니지, 퉁퉁 불어터진 시간을 친구 삼기로 했다 거기부터 길이 열렸다 라면 한 가닥이 달빛보다 환했다 제 꼬불꼬불한 손가락을 펴서 하산하라고 했다 지름길은 언제나 하산이라고 했다 식도가 이 세상 으뜸의 지름길이라 했다 입과 똥구멍이 가장 높은 산이라고 했다 그 사이에 마음이라는 깊은 늪이 있다고 했다
♧ 사그랑주머니
노각이나 늙은 호박을 쪼개다 보면
속이 텅 비어 있지 않데? 지 목 부풀려
씨앗한테 가르치느라고 그런 겨.
커다란 하늘과 맞닥뜨린 새싹이
기죽을까 봐, 큰 숨 들이마신 겨.
내가 이십 리 읍내 장에 어떻게든
어린 널 끌고 다닌 걸 야속케 생각 마라
다 넓은 세상 보여주려고 그랬던 거여.
장성한 새끼들한테 뭘 또 가르치겄다고
둥그렇게 허리가 굽는지 모르겄다.
뭐든 늙고 물러 속이 텅 빈 사그랑주머니를 보면
큰 하늘을 모셨구나! 하고는
무작정 섬겨야 쓴다.
-----
*사그랑주머니 : 다 삭은 주머니란 뜻으로, 속은 다 삭고 겉 모양만 남은 물건을 이르는 말.
♧ 물꼬
이 다음에 흙으로 돌아가
작은 땅이 될 수만 있다면
가문 논에 물을 대주는 물꼬가 되어라
송사리 한 냄비 겨울 들녘에 내미는 물꼬 웅덩이가 되어라
움푹, 제 한 몸 파이는 줄도 모르고 노래부르는
바보 같은 물꼬가 되어라
♧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 햇살의 경문(經文)
날고 싶은 것들이 죽어 흙이 되면 기왓장으로 태어난다 절 마당 가득한 저 기왓장들은 곧 하늘로 날아오를 것이다 새를 꿈꾸었던 영혼의 깃털마다 가족들의 이름과 골목길 복잡한 주소들이 적혀 있다 커다란 새 한 마리가 갈비뼈 뒤편에 업장을 서려 물고 있는 것이다 날고 싶었던 것들의 극락왕생에 낙서하지 마라 목어처럼 텅 빈 새의 뱃속에 알처럼 웅크리고 있다가, 법당 문이나 환하게 열어 제쳐라 그리하여 그 새똥구멍으로 들이치는 찬란한 햇살에 눈이나 부비거라
♧ 열매를 꿈꾸는 새
외발로 서있는 두루미며 백로들은
끝내 나무가 되라는 유언을 들은 게 분명하다
날갯짓마다 나뭇가지 비비는 소리 서걱거린다
외발로 서 있는 그들의 몸통은
무슨 단 하나의 필사적인 열매 같다
아직은 솜털도 못 벗은 풋것이라고
꽃잎 같은 부리를 열어 피라미며 미꾸라지
닥치는 대로 집어넣는다
열매를 흉내내기 전에는 한 송이 꽃봉오리였다는 듯이
벌 나비 수도 없이 들락거렸다는 듯이
노을 받은 커다란 열매들은
제 꽃잎으로 강물을 찍어 올려 닦고 또 닦는다
겨드랑이에 꽃잎을 묻은 채, 강물에
가느다란 밑둥치와 실 뿌리를 담그고 있는 아름다운 열매들
간혹 꽃 이파리를 물 속에 집어넣어
뿌리근처에 붙여보기도 하는
저 횃불 같은 열매들
끝내 숲이 되리라
울음소리에서 장작 타는 냄새 피어오른다
강 안개 속에는, 후두둑 후두두둑
열매 떨어지는 소리 그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