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면형의 집 나무들
* 200여년 된 지방기념물 녹나무(위)와 100여년 된 서귀포 감귤의 원조 미장온주나무
탐문회 답사길에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는 '면형의 집'을 찾았다.
200년 묵은 녹나무가
가슴 가득 석위를 안고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더 뜻 깊은 나무는
백년 넘게 살아온 미장온주나무이다.
1911년 당시 이곳 서홍성당에 근무하던
스페인 신부 엄다께가
왕벚나무를 연구하다가
일본에 있는 동료에게 왕벚나무 묘목 몇 그루 보냈는데,
그 답례로 보내온 14그루의 귤나무 중 하나이다.
지금도 열심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이 나무는
서귀포에 감귤 붐을 일으켰고
대학나무의 모태가 되었다.
모두가 탱자나무를 심어
이 가지를 떼어다 접을 붙이며
과수원 숫자를 늘린
귤나무의 원조라고나 할까?
녹나무의 정기를 받아서일까
이곳 모든 나무가 청청하다.
♧ 나무에게 묻다 - 천서봉
나는 나의 아무것도 나무와 바꿀 생각이 없으나
그가 꿈꾸는 것들을 물어 본 적도 없다.
스님들은 일찍부터 禪房에 들었단다.
지나가던 보살에게 위치를 묻자
낮지 않은 돌담, 속세를 막아서는데
천천히 고개 돌려보니
담장 위로 낯을 내민 대숲이 오히려 나를 보고 있다.
앉았던 돌무지 위를 추스리며 내가 다가가자
대숲은 바람 지는 곳을 가리키며 이내 서걱거리고
사백 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는 그저
소소한 웃음만으로 제 주름 누르고 섰을 뿐이다.
나무들은 언제 이곳에 처음 뿌리 내렸을까.
나뭇잎만큼의 자잘한 햇살 밑으로
세월의 갈피를 펼치고
섬세한 잎맥들의 반흔을 짚어 가면
뒤바뀐 생의 主語들이 왈칵 쏟아져 내린다.
언젠가 내가 게워내던 순한 연둣빛
마른 가지를 닮은 사람 하나
정갈한 싸리비 자국을 밟고
한 번쯤 뒤돌아보며 스쳐가던 기억,
하늘에 닿지 않아도 가늠할 수 있던 내 오래된 궤도의 연원
위를 까치 한 마리 선 긋고 달아난다.
적요한 오후, 적멸궁에 매달린 물고기가
제법 소금기 가신 투명한 파동을 일으킨다. 이제,
나는 묻고 싶다. 우리의 모든 길은
어떻게 圓을 그리다 다시 그 자리에 숨쉬게 되는지.
슬쩍 돌아앉는 나무가
둥근 햇무리, 後光 아래로 들고 있었다.
♧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 - 나해철
--장명규의 그림에 부쳐
나 내 몸에
녹색 잎이 돋길 바라
한 자리에서 평생을 살아도
때 되어 잎 내리고
때 되어 잎 돋아
흐르는 하늘에
머리를 적시면 좋아
꼿꼿이 서서
희망같은 걸로 꿈 같은 걸로
부푸는 살이
키를 키우면
그만치 높은 곳의 바람 속에
흔들려도 좋아
나 내 몸에
때 되면 잎 내리고
때 되면 잎 돋아
한자리에서 우주를 살아도 좋아
소리 없이 열매 맺고
기적도 그렇게
조용하니 좋아.
♧ 나무의 노래 - 김영천
흐린 날은 아침이 더디 오듯이
당신은 늦게 오셔도 좋습니다
이내 머리 위까지 떠올랐어도
잠시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아도 좋습니다
흐린 날은 새들이 낮게 날듯
내가 당신으로 더욱 낮아지려느니
당신이 살짝 다가서는
그 작은 발자국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오늘은 얼마나 가슴이 떨리려는지요
오랜만의 안부를 전하며
해묵은 이야기들을 나누며
마침내 한잎, 두잎 제 푸르른 기억들을 떨구어
마른 가지로 남을 때까지
나는 비로소 오랜 기다림으로 남겠습니다만
더러는 토라져 당신을 잊었다 할지라도
늦겠거든 그리 하십시오
나는 당신이 늘 은밀히 보내는 바람을 위해
지금은 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가끔씩 파르르 떨립니다
♧ 나무에 대한 생각 - 최영희
나무,
사유의 숲은 언제나 깊다
스친 비바람
나무는 평화롭고
난, 조그만 아주 조그만
나뭇가지 끝에 매달리는
한낱 작은 생각이었다가
때론 나무의 생각을 쪼아 올리는
한 마리 새였다가
또 어느 땐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아마 수억 년 전엔
바다였을지도 모를
그 바닷속보다 깊은 나무들의
사유의 세계를 헤엄을 치고
나무는 지금도 또 하나의 푸른 생각을
가지 끝에 달아낸다
물빛보다 푸른 나무들의 사유의 숲
들면 들수록 여유로움 가득한 세계
아! 난 오늘은 먼먼 생을
살고 또 살아낸 작은 풀벌레로
저 숲에 들어
지난 생의 그리움까지
가슴으로 품어 볼까
♧ 종려나무 - 지창영
--포레의 ‘종려나무’를 안희찬의 트럼펫 연주로 들으며
향수에 취해 황혼이 운다.
함성은 가고 나팔 소리 흥건한데
천상의 붉은 깃발 올올이 풀려
너울너울 창공에 흐른다.
짓누르던 어둠을 뒤집고
맨몸으로 여명이 일어서던 날
저마다 꺼내 들고 흔들던
불꽃같은 깃발들
흩어졌던 마른 뼈들이
피와 살을 입던 날
무덤을 박차고 일어나 춤을 추며
목청이 터지도록 부르던 만세 소리
그 날을 재연하듯
구름이 열병식을 한다.
양의 피를 마시고 만취한 깃발
바람결에 부서지는 서녘 하늘
가시에 찔린 영광이 만장으로 흩날릴 때
혁명의 향방을 찾아
트럼펫 조곡이 흐른다.
그 날은 가고 사람은 가도
목메어 흔들던 승리의 징표 기억하라고
구름 속 나팔 소리는
온 하늘에 피를 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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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려나무 : 성서에서는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을 상징한다. 나귀 타고 오는 예수를 백성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환영하였다. 로마인들은 종려 가지를 승리의 상징으로 사용하였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죽음을 극복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승리의 상징으로 사용하였다.
♧ 흔들리는 나무 - 양인숙
흔들리는 나무가 아름다운 이유는
속이 죄다 드러나 보이기 때문이다
바람을 만나면 바람이 되고
구름을 만나면 구름이 되고
더 남겨 둘 것도 없는
투명한 숨결에 전신을 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슬픔에 잠긴 가지와 잔잔한 이파리들 사이로
하늘빛 목청이 여울져 비치지만
세상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목마름을 떨구는 일인 것이다
흔들리면서 나무는 말문을 잃어간다
바라던 소망들도 송두리째 묻어두고
땅 속 깊은 데까지 엉긴 나이테의 꿈도 숨어든다
새소리 바람 소리에
문득 잠 깨고 나면
어둠이 남기고 간 고요 속에서
제 뿌리를 부둥켜안은 채
그 무게만큼 흔들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