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오승철 시조집 ‘터무니 있다’에서

김창집 2016. 7. 21. 10:02


제주골무꽃

 

떴다!

포롱포롱 봄이라 꽃들이 떴다

 

잠시 방심한 사이

오종종 내민 숟갈

 

춘궁기 꽃자리마다

떼거지

그리움 떴다

     

 

삐끼

 

때론 제 일터에 목숨 거는 이도 있네

산수국 가장자리에 듬성듬성 놓인 헛꽃

낮에도 떠도는 홍등

너울너울 홀리던

 

그래서 그런 건가

속명(俗名)마저 도체비꽃

문득 정신 차리니 아직은 이승이네

다행히 이순의 길목 옷매무새 고치네

 

한번쯤 안 속는다면 그게 어디 세상인가

씨 들인 순간부터 아예 훌렁 뒤집은 헛꽃

바스락 마른 그대로 싸락눈발 받고 있네

     

 

 

누이

 

쇠똥이랴

그 냄새 풀풀 감아올린 새순이랴

목청이 푸른 장끼 게워내는 울음이랴

초파일

그리움 건너

더덕더덕 더덕밭

    

 

중대가리나무

 

장마철 배고픈다리

잠겼다 다시 뜨면

산간마을 물웅덩이 슬쩍 내민 예배당

등굣길 놓친 아이들

물세례 치받는다

 

문지르면 비누거품

중대가리나무 이파리

찬송이듯 염불이듯 어머니도 손 비비면

내 누이 재팬드림이 거품으로 묻어난다

     

 

멀구슬나무

 

덩치 값도 못하고 그게 어디 꽃이냐

봄개구리 악다구니

가지마다 슬어논 알

고목에

이 늦바람아

토록토록

터지겠다

     

  

 

처방

 

저거 익으면 내 꺼

침 발라둔 산딸기

슬쩍 찾아왔다 벌에 쏘인 고향아

반세기 못 눅인 그리움

오줌발로 적신다

      

 

 

이윽고

 

나는 부활이다

신제주 왕벚나무

버찌도 이파리도 다 거둔 겨울 허공

지상의

새 울음 하나만

걸어놓은 저녁 한 때

 

이윽고,

어슬어슬 불빛들이 돌아오면

날 잡아봐라’ ‘날 잡아봐라

되살아나는 뫼비우스 띠

골목길 못 달랜 허기 싸락눈발 끌고 온다

 

밤새 누굴 향해 떨구던 낙엽일까

아내의 가게 앞에 일수, 달돈, 반라의 여자

쓸어도 다시 홀리는

안부 같은 명함 한 장

     

 

한가을

 

한여름과 한겨울 사이 한가을이 있다면

만 섬 햇살 갑마장길

바로 오늘쯤이리

잘 익은 따라비오름 물봉선 터뜨리는

 

고추잠자리 잔광마저 맑게 씻긴 그런 날

벌초며 추석명절 갓 넘긴 봉분 몇 채

무덤 속 갖고 가자던

그 말조차 흘리겠네

 

길 따라

말갈기 따라

청보라 섬잔대 따라

아직도 방생 못한 이 땅의 그리움 하나

섬억새 물결 없어도 숨비소리 터지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