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경업 시선집 '자벌레의 꿈'에서
권경업 시인의 블로그
‘봄이 왔어요, 따사로운 봄이...’에 가면,
‘산과 자연을 이웃하는 권경업의 시는
저작권이 없습니다. 무제한 인용을
허락합니다’란 소개가 있다.
권경업은 70년대 부산 지역을 대표하던 전위 산악인이다.
1990년에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을 80여일에 걸쳐 맨 처음 종주 했으며
그때 쓴 연작시 60여 편을 월간 ‘사람과 산’에 연재,
산악시(山嶽詩)라는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는 행동하고 실천하는 시인으로 1989년부터 시작된,
400여명의 결식노인을 위한 무료급식소를 20년 넘게 매일 운영해 오고 있으며
젊음을 산에 바친 일련의 산행경험을
이 땅과 더불어 살고자 하는 보편적 정서로 승화시켜
본격적 산악시로 되살려 내는 작업에 몰두해 왔다.
현재 사단법인 ‘아름다운 사람들’과
1983년에 설립된 부산등반연구소의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시선집 ‘달빛무게’ ‘하늘로 흐르는 강’과
시집 ‘날개 없이 하늘에 다다른’, ‘녹아버린 얼음보숭이’,
‘별들이 쪽잠을 자고 간’,
‘오래 전, 그대도 꽃다운 누군가의 눈부신 눈물이었습니다’,
‘사랑이라 말해보지 못한 사랑이 있다면’,
‘잃어버린 산’, ‘자작 숲 움 틀 무렵’, ‘내가 산이 될 때까지’,
‘어느 산 친구의 젊은 7월을 위해’, ‘산정로숙’, ‘삽당령’,
‘백두대간1’까지 모두 14권을 상재했다.
여기 시들은 거의 지리산이 배경이라
몇 년 전 여름에 다녀온 지리산 풍경을 찾아내어
권경업 시선집 ‘자벌레의 꿈’에 나온 시 몇 편을 옮겨본다.
♧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熱目魚)였나 보다
어찌, 제 속내 다 드러내며 살까
앞앞이 못한 이야기 풍편에 떠도는
바람의 여울목 쑥밭재에 서면 눈물이 난다
신밭골 약초 캐던 외팔이 하씨도
늘 젖어 시린 가슴, 어쩌다 해거름에
남몰래 꺼내 말리다 보면
서러운 마음에도 노을은 뜨거워 눈물은 났으리라
세상을 뜨겁게 바라보는 이
보이는 모든 것이 뜨거운 이
그리하여 뜨거워진 눈을 찬 눈물로 식혀야 한다면
전생에 그대도, 아마
차고 맑은 물에 눈을 식히던 열목어였나 보다
유정(有情)한 시인아! 생명주(生明紬)처럼 풀린 강물
흔들리는 청솔가지에도 눈물이 나고
저무는 멧부리 걸린 조각구름에도 눈물이 난다
아! 우리는 전생에 열목어였나 보다
♧ 시중유화(詩中有畵)
내 시(詩) 안에 걸려있는 이발소 그림
하루 세 번뿐인 막 버스가 자고 가는
팽나무집 큰 처자, 봄바람에
앞산처럼 불러오는 배 감당 못해
제 에미 패물 챙겨들고, 키폰러닝 키폰런
금성트랜지스터에 개다리춤, 도끼 빗 품고 다니던
조수녀석 찾아가던 날
봉알산 청솔갑 져 내리다가, 지난 가을
영림서 콩밥 먹고 나온 마름댁 둘째 녀석
게거품 허옇게 물고 씩씩거리더니
싸릿재 잿마루는 벌겋게 꽃물 들고
장터 하나뿐인 술청에
그 꽃물 든, 영산홍 같은 새 아가씨 왔다며
술도가 배불뚝이 주인, 포마드 짙게 바른 머리
연신 올백으로 빗어 넘기면
외할매 야메틀니 만들어준 돌팔이 치과의사는
족집게로 거울 속 귀밑 제 흰머릴 뽑으며, 짐짓
냉큼 한 입에 넣어도 비린내 전혀 안 나겠다던 난해한 이야기
졸음 겨운 가위소리에 실려, 사각사각
맨살 고샅 아득한 저편으로부터
흙먼지 길 뽀얗게 밀 창 너머 달려옵니다
내 시, 이발소 그림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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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소 그림 : 과장된 표현으로 인해 구도나 내용에 있어서 모순성을 지니고 있는 싸구려 그림. 주로 풍경을 주제로 한 것들이며 이발소에 많이 거려 있어서 통칭 이발소 그림이라고 말함.
♧ 오! 가련한 나의 청춘아 - 권경업
자작숲 푸른 손짓처럼 애타게 불러도
일 없다, 돌아서서
먹장구름 매지구름 천둥번개
억수비 쏟아지던 그 여름 쑥밭재 길을
휘여휘여, 쉼 없이 넘어간 나의 청춘아
꽃 피고 새 우짖는 봄날은
쉬 간다하여 붙잡을 수 없었고
애처롭게, 누렇게 타들어 가는
갈참나무 마른 손짓으로 너를 부른다
한 번도 사랑한다 불러보지 못한
가여운 나의 청춘아
그 흔한 그리움 한번 갖지 못하고
그 많은 기다림 하나 두지 못하고
고갯마루 내려다보이는
백로 추분 한로 상강 그리고 입동이
발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것을
더 무엇 주저하겠느냐
어느새 골 깊은 주름 이마에 드리운,
사랑도 이별도 뜬구름 같았던 나의 청춘아
돗자리 둘둘 말아 옆에 끼고
지리산 국화주 큰 병으로 준비하여
단풍든 개울물 붉게 흘러가는 유평계곡
내 노래에 내가 춤추고 내가 나에게 술잔 권하여
여린 볕, 가을 한나절이라도 취했다 오자
오! 나의 가련한 청춘아!
♧ 아직은 꽤나 남았지만
아직은 꽤나 남았지만
다가올 그 날을 생각하면 즐겁습니다.
지루하다 생각 들면, 훌훌 털고
먼 곳으로 새벽길 길 떠나는
내 삭이지 못한 역마살의 들뜬 마음에
정든 이여! 뜨겁게 눈물 짖지는 마세요.
샹그릴라(Sangri-La)의 길목은 아니더라도
떠돌다가 낮선 거리, 어느
처마 낮은 롯지의 쪽탁자에서
설취해, 다시 만나는 연(緣)이 있다면
졸참나무 누렇게 타들어가는 금정산 가을자락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길섶
비밀스런 우리만의 정원에서
소박해도 아름다웠던 그 술잔들을 위해
그대여! 그대가 떠나올 때는, 꼭
몹시도 그리울 이 푸른 별의
소주 몇 병 챙겨 오십시오
땀에 젖어 벗어놓는 배낭 속에서
그대 영혼의 울림 같은, 소주병끼리 부딪치는 소리에
혹, 촛불이 초록으로 타 오르고
두 개의 달이 함께 뜨는 은하의 어느 별이라 할지라도
객지를 떠돈 나그네의 가슴은 울렁일 것입니다
소주 몇 병 챙기는 일
잊어버린다면 어쩔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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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업은 김홍성 시인에게 사숙(私塾)하였다
-샹그릴라 - 영국 작가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지명. 히말라야에 있다는 이상향, 샹그리로 넘어가는 고개. 샹그리(Sangri)는 마음의 해와 달을 뜻하며 라(La)는 고개를 말하는 티베트어.
♧ 한없이 투명한 너를 두고
한없이 투명한 너를 두고, 허다히
허기진 몸에는 독(毒)이라 말하지만
시인의 타는 갈증에는
쉼 없이 샘솟게 하는 시심(詩心)의 샘이다
낡은 TV의 노이즈현상 같은 먼 기억 속
견딜 수 없이 몰아치던 사춘기 존재의 불안감에
차라리 황량한 모래바람의 텍사스로 가겠다며
늦은 미아리 행 버스를 탈 때도 그랬지만
너로 하여 간덩이 부은 놈 소릴 듣는다 해도
나는 너를 마실 것이며
덕지덕지, 때 엉겨 붙은 내 영혼을
입동을 며칠 앞둔, 저 쑥밭재
잿마루처럼 씻어내고 싶다
아! 진정, 나의 산 같은 소주여! 소주 같은 산이여!
참 진(眞), 이슬 로(露)
♧ 간이역
기적소리 환히 불 밝힌 열차들
그냥 스쳐 지나가고 있는
그나마 내 생의 기회였던, 간이역
허둥지둥 헐레벌떡 달려갔어도
차는 오지 않았습니다, 완행열차는
늘, 떠난 뒤였기 때문입니다
언제일진 모르지만
식은 밥 한 덩이 찬물에 말아먹고
잡는 손 소맷귀 뿌리치며
새벽처럼 달려갈 그날은
인연이 닿으면 다시보자고, 어쩌면
화려한 대합실에서 또 보게 될 거라고
잘 있으라고 잘 가라고, 정든 이들 몇 배웅 나온
조역도 역무원도 없는 초라한 플랫폼
말없이 내 승차하기만을 기다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