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조정의 시와 때죽나무 열매

김창집 2016. 7. 28. 23:52


모처럼 조정 시인의 시를 만났다.

실천문학사에서 2007년에 낸 시집 이발소 그림처럼을 소개한

어느 카페에서 시 몇 편을 얻은 것이다.

 

조정 시인은 전남 영암 출생으로

1998년 국민일보 신앙시 공모최우수상,

2000한국일보신춘문예에 시 <이발소 그림처럼> 당선,

서울 서초동 사랑의 교회 신문 우리편집장이라고 소개되어 있으나,

아무래도 나에게는 그녀가 한국작가회의 여성인권위원장을 맡았을 때,

강정 행사에서 몇 번 뵌 것이 고작이다.

      

아직도 이건 아니다 싶은일을 보면 자신의 일처럼 뛰어들어

다부지게 일하는 정이 많은 아줌마.

여기 싱그럽게 달린 때죽나무 열매처럼

하는 일마다 좋은 결실이 있길 빌어본다.


시인의 말

 

초월리에 갔다.

들판으로 가을 햇빛 투명하게 쏟아져,

선한 나무들이 먼저 얼굴을 붉혔다.

미꾸라지가 아이들을 돌 틈으로 몰고 다니고,

강은 해산 중인 산수유나무를 붙들어주고 돌아와

귓불을 식히는 중이었다.

 

저마다 수런수런 제 일을 맺어가는

종아리 그을린 논둑을 굽어보았다.

계절 지난 샌들을 신은 발등이 죽은 사람 발 같았다.

걸어도 부끄럽고 걷지 않아도 부끄러웠다.

 

칼집을 열고,

칼을 내려놓았다.

 

나는 자웅동체이니,

내 안에 간장(干將)과 막사(莫邪)가 살아,

풀무는 새 불을 피우고, 머리털과 손톱은 자랄 것이다.

                               (20071월 조정)

 

 

 

이발소 그림처럼

 

풀은 한 번도 초록빛인 적이 없다

새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해는 한 번도 타오른 적이 없다

치자꽃은 한 번도 치자나무에 꽃 핀 적이 없다

뒤통수에 수은이 드문드문 벗겨진

거울을 피해

나무들이 숨을 멈춘 채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왔다

지친 식탁이 내 늑골 안으로 몸을 구부렸다

밤이 지나가고

문 밖에 아침이 검은 추를 끌며 지나가고

빈 의자에 앉아

밖을 내다 보면

회색 아이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에 가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잠에 들어 두 편의 꿈을 꾸었다

풀은 흐리고

새는 고요하고

해는 타오르지 않고

티베트 상인에게서 사온 테이블보를 들추고

식탁 아래 몸을 구부렸다

자꾸만 어디다 무엇을 흘리고 오는데

목록을 만들 수조차 없었다

허둥지둥 자동차를 타고 되짚어 가는 꿈은 유용하다

탱자나무 가시에 심장을 얹어두고

돌아온 날도

나는 엎드려 자며 하루를 보냈다

삶이 나를

이발소 그림처럼 지루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사해를 떠나며

 

소금 한 병을 산다

소금 한 병을 나누어 가진다

흩어지지 않으면 소금도 독이 된다

마을에 눈병이 돌 때

문풍지마다 기침 소리가 콜록거릴 때

소금물부터 한 종지 풀어주시던

할머니가 내 눈을 열고

죽은 바다를 보신다

물고기도 살 수 없는 물가에서

그래도 소금같이 좋은 약이 없다고 하신다

너무 악할 수도 선할 수도 없는

지옥도 천국도 아닌

어중간히 절여져야만 살 수 있는 세상을 생각하는

나에게 참 어려운 말씀을 하신다

아가

내가 먼저 죽어야

세상의 약이 되는 법이다

환하게 들리는 음성이 목에 걸려 넘어가지 않는다

죽은 지 사흘이나 된 시신처럼

물 위로 둥실 떠오른 사람들을 바라보시던

할머니는 내 눈 속에 누우시고

한 말씀을 아는 데

나는 평생이 모자라다

어린 종려 화분이 놓인 창 너머

죽은 바다에게서 소금 한 병을 산다

     

 

갈빗집에서 꽃 피는 소리를 듣다

 

아뿔싸

여든 여덟 살 잡수신 이로 고기는 쉽게 못 잡수시는 아버님

간 데 없으시다

 

서빙하는 젊은 여자였다

낙과가 태반인 우리 집 감나무 거름으로 쓸 갈비뼈다귀 한 봉다리 가져 와서

아버님 눈에 제 눈을 썩, 맞추는데

감 열면 저도 주세요오

교태가 자르르르 흘러

맺히지도 않은 올 여름 감꼭지가 모조리 단단해지는데

아찔한 이마를 드니

아버님 간 데 없으시고

관골에 꽃물이 든

내 아들

예쁘게 예쁘게 내 앞에 앉아 계셨다

 

냉면 사발을 추켜들고 남은 국물을 마시는

코끝이 싸하다

나는 냉면 국물에 겨자를 너무 많이 푸는 편이다

   

 

 

바다가 나를 구겨서 쥔다

 

눈이 수평선을 지우고

바다가마우지 떼를 지우고 온다

소나무 숲을 지나 송림 슈퍼에서 뜨거운 커피를 산다

알루미늄캔 속에 출렁이는 바다

낡은 목도리를 두른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끊어진 길을 위해

낡은 자전거를 불태운다

딛고 올라가기에 인생만큼 부실한 사다리도 없다

많은 침묵을 풀어 물위에 내려놓은 사람들이 바다를 빠져나간다

굳이 떠나야만 했던 길을 되짚어 가는 동안

눈은 한정 없이 쏟아지고

출항을 포기한 집들은 문을 깊게 닫고 잠이 들 것이다

빈 탈의실이 문도 없이 떨고 서 있다

푸른 비치파라솔을 그려 넣은 옆구리에 한 사내가 오줌을 눈다

내가 그만 바다와 저 비굴한 기다림과

이 추위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다

빈 캔을 주머니에 넣고

운동화를 벗어 털면

병든 시계바늘이 쏟아진다

엇갈린 바늘처럼 비명을 지르는 시계가 내 발바닥에 고인다

제 때 제 곳으로 가지 못하는 발을 위해 나는 발목을 불태워 버린다

거대한 냉기가 모래를 헤치고 엎드려

손을 내민다

조금 더 내리고 말 눈이 아니다

바다가마우지가 바다를 통째로 삼키고 올라온다

올라오지 않는다

바다가 큰손으로 나를 구겨서 쥔다

   

 

 

철쭉제

 

봄이 천천히

늦게 도착하는 의사처럼 길을 늦추어 오더니

치사량 넘는 꽃을 주사했다

근육질 단단한 능선을 따라

몰아치는

다홍바다*

끊으며 다그치며

꽃은 꽃에 연하여 끝이 없고

산은 산에 연하여 줄기차다

새들이 깊은 하늘로 거침없이 몸을 던져 닿고 있는

한 소식

받아 칠만 하다

---

* : 베풀 진, 늘어놓을 진.

 

 

 

칠량으로 지는 해

 

목선을 마당 앞까지 밀어놓고 칠량만은 잠이 들었다

빈틈없이 꽃피어 배롱나무가 이생을 환하게 벗어난 후였다

묵은 장처럼 찰랑한 햇살 속에

물레는 돌고

흙덩이를 말아 올리며 사내는 돌아보지 않았다

잔 흙은 떨어져

사내의 발등에 떨어지기도 하고 안 떨어지기도 하는데

나는 거기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버린 사내도 없기는 한가지였다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니 덫에 든 쥐도 움직이지 않았다

늙은 갯벌이 슬그머니 바다를 당겨 덮는

기척에 등 뒤가 서늘하였다

저 큰 물레를 누가 돌리고 있었나

배가 부를 대로 부른

옹기 한 잎

물레에서 툭 떨어져 바다를 넘어갔다

   

 

 

애기 옹관

 

그릇인 나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여자가 없어서

나는 그릇이 아니었다

젖은 가슴을 불 속에 두고 애기를 받아 안은

나는 어미였을까

 

어린 새는 죽어서도 내 그물을 끊으며 날아갔다

애끓고 소란하여

천 년이 하루 같았다

머리맡에 풀이 욱거나 봄이 보습 날을 물고 지나갔다

 

꽃대 튼튼한 용설란이 흔드는 산산조각 흰 요령 소리를 듣는다

봇물 터지듯

파헤쳐지는 비탈밭에 정수리가 깨어진 채 나앉아

 

나는 외롭고 마음 평평한 사금파리 되었다

옹기장이가 나를 반죽하여 다시 무엇을 만들 수 없다

   

 

 

빈집

 

죽은 시계가 벽에 붙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등 굽은 부엌문 안에서

시커멓게 다리를 벌리고 쏘아보는 아궁이에게

지켜야 할 약속이 있었던가

뒤란 마타리꽃 얼굴이 눈에 부실 뿐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얼룩 뱀이 등을 빛내며 장독 그늘로 스며들어갔다

마음이 먼지처럼 줄어

빈 손바닥으로 마루를 쓸어 주었다

시작되기 전에 넘치고 멈추지 못해 지나친 기다림이었다

속이 비치는 여름옷 위로 칠점박이 무당벌레들이 날아앉아

살을 더듬어 왔다

같은 어린 것들이

얼굴 깨어진 사진틀을 지나 목구멍까지 늘어진 거미줄을 타고 가물가물

주저앉은 방구들 틈

없는 무릉을 메고 떠도는 쥐며느리 떼를 비추어 주었다

개가죽나무처럼 어두워져서 나는 기우뚱 저승으로 몸을 기울인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