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향' 제6호의 시와 수련
♧ 섬ㆍ동백꽃 - 고응삼
눈, 바람 깊을수록
벙그러진 순정들이
바닷가 아가씨가
입춘 맞아 깨던 꿈을
질그릇 붉게 물들이고
꽃샘 타는 눈 속의 꽃,
살며시 손을 녹여
섬마을 수를 놓고
대 이은 삶의 아픔
고목마다 새겼다가
어머니 밝히던 등잔불로
봄을 여는 섬 동백꽃
♧ 청명 날 - 김대봉
-이장(移葬)
2백 년 잠든 할머니 묘에 할미꽃이 피었다
꼬부랑 나이 몇 번 지나도 아직은 젊었다며
혼자선 적적하다고 지아비 곁으로 모시랬다
♧ 대면(對面) - 김용길
눈빛 맑은 사람을 만나면
웃음 먼저 나와요
얼굴 반쪽 입가에 놓고
사랑니 빼물고
속마음 붉은 까닭을
어찌 말로 다스려요
마음 먼저 웃고
가슴 씻어내리라
그대 등 돌려 눕는다한들
♧ 겨울이 흘린 발자국 - 김정희
아침 공양 풍경이 흔들리는 시간
선림사 대웅전 앞 연못에
날개 파닥이는 바람 왔다 갔는지
빗질된 도량이 경건한데
백팔 배 마치고 나온 잿빛 두루미 한 마리
연못에 마지막 공양처럼 누웠다
찬 겨울이 흘린 발자국처럼
혼자 떨어져 나온 날개는
길 재촉하지 못한 채 얼어붙어
연못을 덮고
밤 동안 날개 아래 숨 쉬는 것들의
따뜻한 겨울을 녹여주고는
빈 몸으로 하늘을 올랐다
하늘에서 날개를 저을 때는
가벼운 바람으로 날았지
땅에 내려놓은 몸은
거대한 목탁처럼 도량을 흔들고
살아있는 것들은 합장으로
숨을 가둔다
♧ 그 세상은 - 윤봉택
저 언덕 아래
하늘문교회가 있고
언덕배기에 성당이
산마루에는 절 하나 있으니
참 좋다
문 하나만 열어 길을 나서면
천당 가는 길
하늘나라 가는 길
극락 가는 길
걱정 필요 없으니
참 편한 세상인데,
문을 닫고
대문을 열지 않으니
그 세상이 하 궁금하다.
♧ 광명사에서 - 이창선
광명사 범종 앞에 서 있는 일붕선사
반기듯 나를 보며 건네는 침묵의 말씀
모든 것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일침 하네.
♧ 이른 봄 햇살 - 정희원
아직은 시골티 못 벗은 색시입니다
낯선 도시를 벗어나
아무도 눈치 챌 사이도 없이
들창틈새로 굴리는
수줍은 눈동자
마루를 건너 부엌으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가
구수한 된장국향기 코끝을 적시고
졸고 있는 친정어머니 앙가슴에
그리움 두고 갑니다.
♧ 相思花 1 - 현주하
우리 할망 시대에
바다는 멍들멍 푸르고
기다림에 지친 상사화
만선되어 돌아온다던
하르방 소리
할망 귀에 쟁쟁 걸어 놓고
한평생 눈물 콧물 한 새가리로
겨울이면 벌러진 화롯불
여덟새 무명짜는 할망 눈썹 새로
동지 스무날 달은 차고 희어서
이어도 하라 떠나던 낭군 얼굴
설다 설다 하도 설어
하랑 무덤엔 올해도
상사화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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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향(慧香)'은 혜향문학회(제주불교문학인의 모임)에서 발간하는 문학지이며, 사진은
동백동산 옆 연못에서 굵은 빗방울이 듣기 시작할 때 찍은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