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꽃 피는 아침
말복, 처서 다 넘기면서도
열대야에 시달리는 저녁이다.
내일 늦게나 서울, 중부지방에
소나기가 내려 기온이 내려간다니
이곳은 내일도 열대야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리고 9월 들어서도 더위는 여전하겠다니
지구가 고장 나도 단단히 고장 난 것 같다.
나팔꽃,
어릴 때 학교에서 씨를 받아다
울밑에 심어놓고
장대를 꼽거나 줄을 매어
하나둘 꽃을 세며 방학 일기를 썼는데,
이제는 동구밖 공터에서도 넘쳐나고
엉뚱한 곳에서 야생으로 마구 자라
원예종인지 자생종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었다.
♧ 나팔꽃 - 김윤현
가느다란 줄이라도 있으면
왼쪽으로 돌며 감아 오른다
가무는 날은 잎을 늘어뜨려
걸어온 길 되돌아서지 않는다
견디고 견디다가 한 걸음 내 딛는
수도승의 고행이다
나팔도 없다
나팔 소리도 내지 않는다
다른 꽃들이 다다를 수 없는 곳까지 이르러
지나 온 곳마다
나팔 모양의 꽃을 달아 둔다
순례자들의 긴 행렬이다
순례는 아침 일찍 시작된다
나팔꽃은 세상의 아침을 여는 법문
그 법문이 환하다
어디 법문 외는 소리 들릴 듯하다
♧ 나팔꽃 - 김정호
별들이 서성일 때
아무도 모르게 피웠다가
햇살 오르면 시들어 버린 꽃
너는 눈빛으로 웃으면서
가슴으로 울고 있구나
달빛 머물다 여명 찾아와
이슬되어 달래도
꽃잎을 지우고 마는구나
슬픈 여인의 입술같은 꽃이여
달빛아래 누운 눈부신 네 나신(裸身)은
차디찬 새벽공기에 파르르 떨고
그런 슬픔이
하늘을 울릴 수 있을까
그래도 검붉은 꽃잎으로
내 부끄러움 감추며
긴 밤을 쓸어내린다
♧ 나팔꽃은 왜 피는가 - 이수정
내
가슴속에서
희망 하나가 거품처럼
거품처럼 꺼진 다음날
내
창가에서
나팔꽃 한 송이가 푸른빛으로
푸른빛으로 피어났다
아침이 여느 때처럼
방에 스미고
아내는 세수를 한다
그래
내일 또
희망 하나가 꽃처럼
저 꽃처럼 피어날 테지...
♧ 나팔꽃 - 임두고
담그지 않아도 서늘한
물빛의 그대 눈언저리에
아침마다 팽팽하게 터지는 나팔꽃은
감추지 못할 내 아픈 언어의 입술
자옥히 엎드려
속속들이 설레이는 안개 속
동여맬 사랑이 깊어
끝갈 데 모를 덩굴손은
쉽게 다스릴 수 없는 그대 가슴 한 켠에
거듭거듭 매듭지고 싶은
내 소망의 닻줄
한 순간으로 눈감고 말
순은의 아침이여
사랑이여
그대 영혼 속에 다발로 번지고 싶은
내 아픈 영혼의
팽팽한 종소리를 듣는가
♧ 나팔꽃 - 박상천
아파트 앞마당에 심은
나팔꽃 덩굴이 뻗어나가도록
줄 하나 걸어주었다.
나팔꽃의 꽃말이 허무한 사랑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매일 매일 덩굴손으로 그 줄을 붙잡고
온몸을 꼬아가며 길을 가는 나팔꽃.
나팔꽃의 꽃말이 왜 허무한 사랑일까.
길이 끝난 곳에 이르자 마침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만
더 이상 붙잡을 끈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이내 시들어간다.
사랑의 줄타기,
온힘을 다해 뻗어나가 보지만
어느 곳엔가 이르면 길이 끊긴다.
오늘도 그렇게 애써 길을 가고 있는
나팔꽃의 꽃말은 허무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