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카 일기

나팔꽃 피는 아침

김창집 2016. 8. 25. 00:34


말복, 처서 다 넘기면서도

열대야에 시달리는 저녁이다.

 

내일 늦게나 서울, 중부지방에

소나기가 내려 기온이 내려간다니

이곳은 내일도 열대야라는 얘기가 아닌가?

 

그리고 9월 들어서도 더위는 여전하겠다니

지구가 고장 나도 단단히 고장 난 것 같다.

 

나팔꽃,

어릴 때 학교에서 씨를 받아다

울밑에 심어놓고

장대를 꼽거나 줄을 매어

하나둘 꽃을 세며 방학 일기를 썼는데,

이제는 동구밖 공터에서도 넘쳐나고

엉뚱한 곳에서 야생으로 마구 자라

원예종인지 자생종인지 분간을 못하게 되었다.

        

 

나팔꽃 - 김윤현


가느다란 줄이라도 있으면

왼쪽으로 돌며 감아 오른다

가무는 날은 잎을 늘어뜨려

걸어온 길 되돌아서지 않는다

견디고 견디다가 한 걸음 내 딛는

수도승의 고행이다

나팔도 없다

나팔 소리도 내지 않는다

다른 꽃들이 다다를 수 없는 곳까지 이르러

지나 온 곳마다

나팔 모양의 꽃을 달아 둔다

순례자들의 긴 행렬이다

순례는 아침 일찍 시작된다

나팔꽃은 세상의 아침을 여는 법문

그 법문이 환하다

어디 법문 외는 소리 들릴 듯하다

        

 

나팔꽃 - 김정호

 

별들이 서성일 때

아무도 모르게 피웠다가

햇살 오르면 시들어 버린 꽃

너는 눈빛으로 웃으면서

가슴으로 울고 있구나

달빛 머물다 여명 찾아와

이슬되어 달래도

꽃잎을 지우고 마는구나

 

슬픈 여인의 입술같은 꽃이여

달빛아래 누운 눈부신 네 나신(裸身)

차디찬 새벽공기에 파르르 떨고

그런 슬픔이

하늘을 울릴 수 있을까

그래도 검붉은 꽃잎으로

내 부끄러움 감추며

긴 밤을 쓸어내린다

        

 

나팔꽃은 왜 피는가 - 이수정

 

가슴속에서

희망 하나가 거품처럼

거품처럼 꺼진 다음날

 

창가에서

나팔꽃 한 송이가 푸른빛으로

푸른빛으로 피어났다

 

아침이 여느 때처럼

방에 스미고

아내는 세수를 한다

 

그래

 

내일 또

희망 하나가 꽃처럼

저 꽃처럼 피어날 테지...

        

 

나팔꽃 - 임두고

 

담그지 않아도 서늘한

물빛의 그대 눈언저리에

아침마다 팽팽하게 터지는 나팔꽃은

감추지 못할 내 아픈 언어의 입술

자옥히 엎드려

속속들이 설레이는 안개 속

동여맬 사랑이 깊어

끝갈 데 모를 덩굴손은

쉽게 다스릴 수 없는 그대 가슴 한 켠에

거듭거듭 매듭지고 싶은

내 소망의 닻줄

한 순간으로 눈감고 말

순은의 아침이여

사랑이여

그대 영혼 속에 다발로 번지고 싶은

내 아픈 영혼의

팽팽한 종소리를 듣는가

    

 

 

나팔꽃 - 박상천

 

아파트 앞마당에 심은

나팔꽃 덩굴이 뻗어나가도록

줄 하나 걸어주었다.

나팔꽃의 꽃말이 허무한 사랑이라는 건

나중에야 알았다.

매일 매일 덩굴손으로 그 줄을 붙잡고

온몸을 꼬아가며 길을 가는 나팔꽃.

나팔꽃의 꽃말이 왜 허무한 사랑일까.

 

길이 끝난 곳에 이르자 마침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리지만

더 이상 붙잡을 끈이 없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이내 시들어간다.

사랑의 줄타기,

온힘을 다해 뻗어나가 보지만

어느 곳엔가 이르면 길이 끊긴다.

오늘도 그렇게 애써 길을 가고 있는

나팔꽃의 꽃말은 허무한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