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늙어버린 팽나무 이야기
내 어릴 적 고향 마을은 팽나무 세상이었다.
골목 어느 하나 조금만 여유가 있는 자리엔
나이든 팽나무가 있어 아이들이 놀이터가 되었고,
여름 동네 어른들의 모여 노는 그늘로 자리 잡았다.
어느 유서 깊은 마을을 찾으면
이끼와 콩짜개덩굴 덕지덕지 매달린 팽나무가 그 역사를 말해줬다.
한여름 그 열매는 우리들의 훌륭한 간식거리.
육지부엔 보통 느티나무가 그 자리를 차지하지만
제주는 바로 ‘폭낭’이라 하여 정자목으로,
또는 신당(神堂)의 신목(神木)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러던 것이 새마을 운동으로 길을 바로 내면서
전부 잘라버리고 정자도 없애버려,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온 사람들이 집을 찾지 못해 헤매게 했다.
이제 밀감을 비롯한 특용작물 재배를 하면서
새로 들여온 과실수에 묻어온 해충이
팽나무 순이 연하게 나올 무렵,
모두 잎을 갉아 먹어 얽게 만들어
제대로 남은 것을 만나 보기 힘들다.
지난 금요일 제주시 노형동 모 아파트 단지에서
노구를 이끌고 힘들게 버티고 있는 이 팽나무를 만나
한동안 그 모습을 담으려 노력해 보았다.
♧ 팽나무가 있는 골목 - (宵火)고은영
그 확고한 기억엔 눈물이 묻어있다
관음증을 앓는 어둠에
총총 다녀가는 별들의 발자국엔
늘 그리운 안부가 찍혀 있고
그곳은 안녕한가요?
묻는 말에 스치는 얼굴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큰 오빠
그리고 잘 생긴 우리 인호
오랜 방황을 끝내고 돌아온 바람에
아름드리 팽나무 아연한 줄기마다
오로지 한철 자유롭게 유영하는 잎새
더운 계절을 저장하는 일은 눈물겨운 일
자꾸만 일렁이는 눈자위에
정돈되지 않았던 지난겨울을 밀어내는 일
기억의 가슴으로 쿵쿵 심장이 노크를 한다
어둠의 순환이 예고된 전철을 밟고 지나도
기다란 골목으로 낡은 자전거가
그리운 풍경을 데리고 돌아오기를
♧ 우리 고향 팽나무 - 정숙자
뼈마디 몇 개
내어놓고 살았다
큰무당
열병 들어
찢겨나간 하늘
뺑덕어멈
늦도록 웃다가
잠든 지붕도
우리 고향
삼백 살 넘은 팽나무는
그러려니, 하고만
바라보면서
너호 너호 에이넘차 너호
너호 너호 에이넘차 너호
노랑색
남색
부화하는 별
팔 안에 들여놓고 순이 고왔다
♧ 팽나무의 전설 - 김정호(美石)
고향집 돌담 위
팽나무 여린 가지 하나
안마당 이곳저곳 기웃거린다
옛 주인을 찾는 것일까
아버지 떠난 후 누군가의 손에
허리까지 잘려 나간 팽나무
하늘을 쳐다볼 수 없어
밑으로만 뿌리를 내리는
바위가 되는가 싶었다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
옹이 진 아버지 가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저 팽나무
옹이 진 가슴 수없이 감고 돌아
온몸으로 아픈 세월 삭이더니
지난봄부터 허리 아래
더듬거렸던 시간 비워 내고
새로 돋은 저 푸른 기운 하나
저것은 아버지의 들 푸른 혼일까
아니, 잊혀져 간 우리 집 팽나무 전설이
다시 시작된 것인가
♧ 팽나무를 찾아서 - 서지월
햇빛 쏘다니던 풀밭에서 잃어버린 구슬처럼 떠오르는 이름, 하늘과 땅 사이를 기어오르던 海溢도 멈춰버린 某年 某月 某日…… 등 굽은 할머니는 들깨밭 너머 살고 할아버진 書堂에서 훈장 노릇 했거늘, 팽나무는 어디에서 무성한 잎 틔웠는지. 반질반질한 먹오딧빛 툇마루 너머 하늘이 우우 바람과 함께 몰려올 때면 나루터의 물살은 노 저어간 빈 배를 따라서 지금은 어느 강기슭에 자는 듯이 누워버렸는지
어야, 어야, 어야, 어야……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꽃상여는 北邙山川을 향하고 나고 죽는 꽃들이 질펀히 피어서 하늘을 가리우나니
♧ 누가 용화의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강희정
속세에 인연이 없어 바람처럼 이산저산 떠도는 그대도
때로는 인간이 못 견디게 그리운가보다
한줄기 구름처럼 살다가고파 언덕아래 부휴당을 짖고
주위에 대숲을 병풍처럼 둘리었다
스산한 대 바람 소리도 그리운 님 곁에 있으면 그 소리도 살갑게 들린다
하늘 향해 두 팔 벌린 호연지기 팽나무
그리운 님 보고 싶어 홀로 우는 밤이면 달빛을 가리는 후박나무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날이면 술 한 잔에 얼큰 취해
청사초롱 흔들리는 수줍은 능소화
털이 보숭 보숭 귀여운 연꽃 너럭지에 잠들고
나의 대금산조에 맞추어 그대는 시를 읊조리고
강아지 한 마리 옆에서 잠꼬대를 하며
하늘엔 동물친구들 총총
누가 용화의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 그대 가슴에도 감춰진 숲이 있다 - 최상호
그대 가슴에
그대가 모르는 숲이 있다
물방개 헤엄치는 정겨운 웅덩이와 오염 안 된
물줄기에 닿은 튼튼한 뿌리의 갈참나무가 서 있는
거기에는
조용히 그러나 건강한 물풀들이 흔들리고
태고의 향기를 뿜으며 썩어 가는 도토리로
떡갈나무 아래가 그득하다
경외敬畏의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던 팽나무는
여전히 늙은 모습인 채,
가시 넝쿨 아래로 바람이 분다
휘파람 소리 같은,
빗소리 같은 이름 모를 새들의 웃음과
나무들의 합창을 들으며
이제는 지친 손발을 모으고 쉬어야 할 때다
교목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그대의 잠을 깨울 때까지
이제는 누워 보라 안식하라
그대 가슴에서 그대를 기다리는 숲으로 향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