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케의 가을 시편과 수크령
♧ 가을날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놓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그들을 완숙케 하여
마지막 단맛이 진한 포도주 속에 스며들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에도 오래 고독하게 살면서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레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고독
고독은 비와 같다.
저녁을 향해 바다에서 올라와
멀리 떨어진 평야에서
언제나 적적한 하늘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비로소 도시 위에 떨어진다.
밤도 낮도 아닌 시간에 비는 내린다.
모든 골목이 아침을 향할 때,
아무 것도 찾지 못한 육체와 육체가
실망하고 슬프게 헤어져 갈 때,
그리고 시새우는 사람들이 함께
하나의 침대에서 잠자야 할 때,
그때 고독은 강물 되어 흐른다…….
♧ 가을
나뭇잎이 진다. 멀리에선 듯 잎이 진다.
하늘의 먼 정원들이 시들어버린 듯.
부정하는 몸짓으로 잎이 진다.
그리고 깊은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
다른 별들에서 떨어져 고독에 잠긴다.
우리들 모두가 떨어진다. 이 손이 떨어진다.
보라, 다른 것들을. 모두가 떨어진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이 있어, 이 낙하를
한없이 너그러이 두 손에 받아들인다.
♧ 가을의 마지막
언제부턴가 나는
모든 것이 변하는 것을 보아 온다.
무엇인가 일어서고, 행동하고,
죽이고 그리고 슬프게 하는 것을.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정원은 모습이 달라진다.
노랗게 물든 정원의
누렇게 되어 버린 완만한 조락.
그 길은 참으로 멀었다.
지금 텅 빈 정원에서
가로수 길을 모두 내다본다.
엄숙하고 억누른 듯한
답답한 하늘을
먼 바다 끝까지 거의 다 볼 수 있다.
♧ 추억
그리고 너 기다리고 있다,
너의 삶을 한없이 늘려주는 한 가지 것을.
강력한 것을, 예사롭지 않은 것을,
돌이 눈을 뜨는 것을,
너를 향한 깊숙한 것을.
책장에 꽂힌 책의 표지들이
어스레하게 황갈색으로 저물어간다.
그러자 너는 생각한다,
지나온 나라들을, 많은 형상을,
다시 버림받은 여인들의 의상을,
그때 갑자기 너는 깨닫는다, 이것이었다고.
너는 일어선다.
그러면 네 앞에 지난 일 년의
불안과 형상과 기도가 서 있다.
♧ 밤의 언저리에서
저물어 가는 대지 위에 깨어 있는
나의 방과 이 넓이는-
하나이다. 그리고 나는
울려 퍼지는 폭넓은
공명 위에 매여 있는 한 가닥의 현(絃)이다.
사물은 모두
떠들어 대는 어둠으로 가득 찬
바이올린의 몸통이다.
그 속에서 여인들의 울음이 꿈을 꾸고 있고
모든 사람의 원한이
잠을 자면서 꿈쩍거리고 있다…….
나는 은빛으로 몸을 떨어야 한다.
그러면 내 밑에 있는 것이 모두 살게 되고
사물들 속에서 해매고 있는 것이
빛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물결치는 하늘에 싸인
춤추는 나의 음향에서
좁고, 애타게 그리워하는 틈새기를 지나서
예대로의
끝없는 나락에
떨어지는 빛을 향해…….
* 릴케 시집(송영택 옮김, 문예출판사. 2014.)에서
사진 : 가을의 들판을 장식하는 수크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