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향기

문순자 시선집 ‘왼손도 손이다’

김창집 2016. 9. 26. 23:32



꿀풀

 

더도

덜도 아닌

아홉 살 눈부처다

 

삼단 같은 머리칼

알루미늄 솥 바꾸던 날

 

덤으로

덤으로 받은

어머니 브로치다

    

 

 

송악산 으아리꽃

 

기어이 허공에 올라 별이 되고 말리라

기도하듯, 절규이듯, 절벽을 차오르는

초가을 파도소리를

감아올린 으아리꽃

 

그리움은 지상의 일, 하늘은 허공일 뿐

종일 땅바라기 그 끝에 바다바라기

육지와 바다도 그냥 물끄러미 쳐다볼 뿐

 

마라도 가파도가 쏘아올린 이 꼭대기

몹쓸, 몹쓸 모슬포바람 온몸으로 울고 마는

하산길 내가 서 있던

그 자리도 하늘이었네

        

 

무꽃

 

송구하고

송구한 건

하늘도 마찬가지

 

거저 줘도 안 뽑아가는

천여 평 월동무밭

 

여태껏

못 갈아엎고

누리느니,

이 호사!

        

 

사람주나무

 

궁리 끝에

장기요양급여 신청서 내고 온 날

아흔의 아버지는 한사코 마다신다

나랏돈 못 먹겠다고

단풍든

사람주나무

    

 

 

황근 관제탑

 

방학 중인 교정에 황근꽃이 찾아왔다

단 한번 검정고시도 없이

슬그머니 따라와서

만학도 비탈진 가슴에 사태지듯 피고 있다

 

왜 이 꽃잎에선 똥돼지 울음이 만져질까

두벌 세벌 키운 새끼, 학비도 겨우 대고

물 건너 육지 간 사이

엽서 한 장 없던 꽃

 

이젠 리어카 대신

유모차 미는 어머니

소금밭 같은 팔순 세월, 몸에도 간이 배어

말말끝 선소리하신다, ‘학교마당만 다녔어도......’

 

흡사 공전하듯 반평생 휘돌아 온

명주잠자리 날개 같은

내 그리움의 관제탑

이착륙 허가도 없이 속수무책 달려드는

    

 

 

장마철 수국꽃길

 

섬 끝 마을

종달리에선

바람 끝이 보인다.

 

문득 듣는 무적 같은

아버지 부음 같은

 

허기진

4·3의 세월

고봉밥 떠서 돈다

        

 

산수국

 

장마철엔 은연중 날 피하는 길이 있다

한라산 동쪽능선 삼의오름 채 못 미처

한 사발 배고픈 수국

인광(燐光)을 품고 있다.

 

그런 길. 그런 오후엔 빙초산 냄새가 난다

갓 스물에 세상 뜬 주근깨투성이 그 애

서늘히 등짝 후린다, 속수무책 청보라로

 

지금 내 나이쯤 아버지도 어찌 못한

그래, 사촌이랄지 아니면 남남이랄지

어쩌면 가문의 숙명, 목젖 걸린 가시 같은

 

도채비꽃이라 한다, 그것도 낮 도채비

오뉴월 장맛비가 널 그렇게 홀렸구나

이 땅에 종자 하나도

못 거둔 저 무성화야.

    

 

비치미오름 피뿌리풀

 

꿩이 나는 형상에 왔다

나도 이젠 날고 싶다

조간신문 한켠에 유물 같은 사진 한 장

땅문서 순순히 내주고

돌아앉은, 그 형상에 왔다.

 

내 땅에 내가 왔다

내 왕관 어디 있나

날개 접은 왕가가 흑백으로 돌아왔다.

한라산

비치미오름,

잔술로 또 청해 놓고

 

잠시 중국에 와 반도를 본다, 섬을 본다

조선의 치맛자락 눈부처로 다가서면

그분은 어딜 가셨나

꾸엉

피뿌리풀

 

멸종위기 풀꽃의 노래, 그 손자가 부르는 노래

메아리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가면

가난한

문패를 바칠

그런 집을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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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의 비둘기집한 소절


♧ 문순자 '왼손도 손이다'(고요아침 현대시조 100인선 20, 201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