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순자 시선집 ‘왼손도 손이다’
♧ 꿀풀
더도
덜도 아닌
아홉 살 눈부처다
삼단 같은 머리칼
알루미늄 솥 바꾸던 날
덤으로
덤으로 받은
어머니 브로치다
♧ 송악산 으아리꽃
기어이 허공에 올라 별이 되고 말리라
기도하듯, 절규이듯, 절벽을 차오르는
초가을 파도소리를
감아올린 으아리꽃
그리움은 지상의 일, 하늘은 허공일 뿐
종일 땅바라기 그 끝에 바다바라기
육지와 바다도 그냥 물끄러미 쳐다볼 뿐
마라도 가파도가 쏘아올린 이 꼭대기
몹쓸, 몹쓸 모슬포바람 온몸으로 울고 마는
하산길 내가 서 있던
그 자리도 하늘이었네
♧ 무꽃
송구하고
송구한 건
하늘도 마찬가지
거저 줘도 안 뽑아가는
천여 평 월동무밭
여태껏
못 갈아엎고
누리느니,
이 호사!
♧ 사람주나무
궁리 끝에
장기요양급여 신청서 내고 온 날
아흔의 아버지는 한사코 마다신다
나랏돈 못 먹겠다고
단풍든
사람주나무
♧ 황근 관제탑
방학 중인 교정에 황근꽃이 찾아왔다
단 한번 검정고시도 없이
슬그머니 따라와서
만학도 비탈진 가슴에 사태지듯 피고 있다
왜 이 꽃잎에선 똥돼지 울음이 만져질까
두벌 세벌 키운 새끼, 학비도 겨우 대고
물 건너 육지 간 사이
엽서 한 장 없던 꽃
이젠 리어카 대신
유모차 미는 어머니
소금밭 같은 팔순 세월, 몸에도 간이 배어
말말끝 선소리하신다, ‘학교마당만 다녔어도......’
흡사 공전하듯 반평생 휘돌아 온
명주잠자리 날개 같은
내 그리움의 관제탑
이착륙 허가도 없이 속수무책 달려드는
♧ 장마철 수국꽃길
섬 끝 마을
종달리에선
바람 끝이 보인다.
문득 듣는 무적 같은
아버지 부음 같은
허기진
4·3의 세월
고봉밥 떠서 돈다
♧ 산수국
장마철엔 은연중 날 피하는 길이 있다
한라산 동쪽능선 삼의오름 채 못 미처
한 사발 배고픈 수국
인광(燐光)을 품고 있다.
그런 길. 그런 오후엔 빙초산 냄새가 난다
갓 스물에 세상 뜬 주근깨투성이 그 애
서늘히 등짝 후린다, 속수무책 청보라로
지금 내 나이쯤 아버지도 어찌 못한
그래, 사촌이랄지 아니면 남남이랄지
어쩌면 가문의 숙명, 목젖 걸린 가시 같은
도채비꽃이라 한다, 그것도 낮 도채비
오뉴월 장맛비가 널 그렇게 홀렸구나
이 땅에 종자 하나도
못 거둔 저 무성화야.
♧ 비치미오름 피뿌리풀
꿩이 나는 형상에 왔다
나도 이젠 날고 싶다
조간신문 한켠에 유물 같은 사진 한 장
땅문서 순순히 내주고
돌아앉은, 그 형상에 왔다.
내 땅에 내가 왔다
내 왕관 어디 있나
날개 접은 왕가가 흑백으로 돌아왔다.
한라산
비치미오름,
잔술로 또 청해 놓고
잠시 중국에 와 반도를 본다, 섬을 본다
조선의 치맛자락 눈부처로 다가서면
그분은 어딜 가셨나
꾸엉∼꿩∼
피뿌리풀
멸종위기 풀꽃의 노래, 그 손자가 부르는 노래
‘메아리소리 해맑은 오솔길을 따라’* 가면
가난한
문패를 바칠
그런 집을 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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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석의 〈비둘기집〉 한 소절
♧ 문순자 '왼손도 손이다'(고요아침 현대시조 100인선 20, 2016.)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