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천 제6시집 '삐딱하게 서서'
♧ 김영천
*목포문인협회장 역임
*시향문학회장 역임
*목포문화예술상 수상
*전남시문학상 수상
*시집 <슬픔조차 희망입니다>
<낮에 하지 못한 말>
<부끄러운 것 하나>
<몇 개의 아내>
<찬란한 침묵>
♧ 삐딱하게 서서
언제부터인가
지구처럼
나는 좀 삐딱하게 서 있습니다
세상의 온갖 소문처럼
감언이설의 모든 유혹처럼
당신들의 이야기도
삐딱하게 듣고
당신들의 미소도
삐딱하게 봅니다
삐딱한 건 애초부터
내 마음의 빛깔인가 봅니다
세상만사 삐딱하게
볼 수 있어야
좋은 시가 나올지도 몰라서요
건들건들 걸음조차 삐딱하게 걷지요
아뿔사
나는 어제나 오늘이나 여일한데
신발 밑창이
사이시옷처럼
삐딱하게 닳았습니다
♧ 함께 살아가는 것
크게 성공하지 못해도
사방 곳곳에 이름 날리지 못해도
그냥 살다가 가는 것조차
얼마나 아름다운가
세상에 이름 모를 갖가지 풀꽃들이
그냥 그렇게 피었다 지듯
우린 그저
함께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뜻 있는 일인가
조금씩 웃고 또는 슬퍼하고
절망하는 만큼 꿈도 꾸고
그렇게 그냥 사는 것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 찔레꽃 환한 날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이
비록 천치 같은 말뿐이더라도
이렇듯 지천으로
찔레꽃 환한 날은
새 알 몇 개를 품고 싶다
열흘 스무 날도 꼼짝 않고
내 몸의 온기 다 내어주며
더러 늦은 것들은
무딘 부리로 쪼아주며
오늘도 그렇게 절실하게
세상 하나를 가득 품고 싶다
오직 따뜻한 가슴뿐이지만
오직 아둔한 입뿐이지만
껍질이 두껍고 견고할지라도
옹알거리며 깨어날
개명천지를 그리며
동그랗게 가슴을 열어주며
그대를 깊이 포란하고 싶다
♧ 목숨을 걸 일
내게 잉태할 능력이 있었다면
나는 저 들꽃을 품었을 거야
수정하지 않고도
마음껏 회임할 수 있다면
저 하늘의 별들, 바람,
일렁이며 흐르는
저 강을 품었을 거야
모든 어미들처럼
열 달 내 끙끙 앓으며
기꺼이 산고의 아픔을 겪으며
향기 없는 꽃, 이름 없는 별
낮은 회오리바람
그런 것들이 태어나더라도
나는 목숨을 걸었을 거야
내게 수태할 능력이 있다면
절망조차도 품었을 거야
모든 어미들처럼 천 년도 더 오래
떠나버린 것들이 끝내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거야
♧ 풀잎의 노래
그대의 원심력과 나의 구심력을 부딪쳐
균형을 이루며
그렇게 사는 것이지요
때론 내 쪽으로 좀 기울고
때론 그대 족으로 좀 기우나
내가 실족하여 넘어져도 벌떡 일어서는 것이
그대의 힘이라면
그대 날아가지 못하게 묶어 두는 것은
나의 간절한 그리움이지요
나의 주위를 공전하며
환하게 비추던 빛이라 하더라도
희망이나 영광 따위로 명명되더라도
어둠을 부디 다 깨치지는 마십시오
문득 내가 너무 밝아 그대를 탐할까 하는 것이니
나를 의지해 일어서는
저 바람들을 보십시오
지금은 한낱 낮은 풀잎이지만
엎드려 하나하나
나를 피워 내고야 말 것입니다
♧ 나를 이루는 것
지식이나 지혜나 믿음 같은 것들을
내가 소유하듯,
그 무형의 것들이 인격을 이루듯
그리움이나 사랑도 그렇지요
비록 당신은 멀더라도
내 안에 있습니다
웃음이나 눈물이나
그런 것들이 그러하듯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나를 이룹니다
한 발쯤 뒤로
물러셔서서,
이제 내가 잘 보이십니까
* 김영천 제6시집 ‘삐딱하게 서서’(창조문학사, 2016.)에서
사진 : 집앞 소공원 후피향나무 열매(10.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