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해리 시집 '치매행致梅行'의 가을
요즘 Facebook에는
洪海里 시인이
'아내에게 바치는 안타까운 사랑 고백' 시편인
‘치매행致梅行’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근래 주변에 환자가 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고 있는 '치매'에 대해
‘이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면서
이 시를 그 환자를 돌보고 있는 분들에게 바쳐
조금이라도 위안을 주고 싶어 합니다.
가을을 맞아
분위기 물씬 풍기는 갈대 사진과 함께
그 중 가을 관련 시 몇 편을 옮겨 봅니다.
♧ 갈대숲
-치매행致梅行 · 26
바람 부는 날에는 갈대숲에 가리
날개 접고 포근히 잠든 청둥오리
빈 들녘에 서걱이는 갈바람 소리
흘러가는 세월 따라 잠든 물소리
바람 부는 밤에는 갈대숲에 가리
아내 손을 잡고서 갈대숲에 가리.
♧ 가을 하늘
-치매행致梅行 · 28
아득하다는 거리는 차라리 없는 것
덧없다는 말은 오히려 애틋한 것
우리의 인연은 전생서 이생까지
아득한 거리는 이승서 저승까지
아내여, 지금 가는 길이 어디리요
하늘은 맑은데 오슬오슬 춥습니다.
♧ 무현금無絃琴
-치매행致梅行 · 29
오동이 천년을 서서 속을 비우니
줄이 없어도
바람이 와서 거문고를 뜯고 있습니다
금현琴絃이 울지 않는데도 귀가 향긋합니다
아내도 저 소리를 듣고 있을까요
아내도 귀가 향긋해 하고 있을까요
갈비뼈를 현금 삼아 한 곡조 뜯으면
봄바람 향기로 울릴까요
향기로운 꽃으로 들릴까요
아내 홀로 오는 길 어두울까 봐
등불 하나 밝혀 걸고
가슴에 촛불 하나 켜 놓았습니다.
♧ 문답연습
-치매행致梅行 · 30
아내는 묻고
나는 대답하고,
짜증내고
후회하고.
또 묻고
대답하고,
화내고
반성하고.
하루 종일
묻고
하루 종일
대답하고,
짜증내고
화내고
후회하고
반성하고.
♧ 빈집
-치매행致梅行 · 32
이승 길
구비구비
돌아가는 길
꽃 피고
지면서
하늘까지 밝혀주는
산굽이 물굽이마다
이름 지우고
그림자 지우고
너에게 주는
아무것도 없는
노을 진 산머리
눈먼 천리
길 없는 길 벋어가고
물 마른 강 중심으로
귀먹은 천년
잠들어 가고 있는
빈집 한 채
아득합니다.
♧ 노래
-치매행致梅行 · 33
눈물로 노래를 씻어 부르면
노래마다 구구절절 빛이 날까
눈썹 끝에 별을 달고
홀로 가는 길
별 내린 풀숲에서
실을 짜 엮고 있는 풀벌레들
계절은 가릉가릉 현악기로 울리고
달빛 타고
하늘 가득 날아가는 기러기 떼
허공중에 떠가는
수많은 섬이구나
날갯짓마다 파도가 일어
가을이 젖는데
내 저 섬을 비추는 등대라면
하늘길 안내하는 불빛이라면!
♧ 잠시
-치매행致梅行 · 34
푸르고 짙던 그늘
가을이 되자 많이 엷어지고
모든 길이 하나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내가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피가 도는 동안 등 떠밀지 말아 다오
잠시 네 곁에 머물다 가는 거야
아프다는 말 하지 말라고
한마디 하고 나서,
나도 한 마리 누에가 되어
실을 낳을 수 있다면
말씀의 명주明紬옷 한 벌 마련하련만.
♧ 초겨울
-치매행致梅行 · 35
풀잎 시들고
바람 잠들고
초로草露처럼 맑게 나이 들 수 있다면
할 일 다 했다고
맨발로 건너가는
찬 시냇물
천명天命의 흐름 좇아
그냥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일상의 형상과 빛깔들
제발 내버려 둬 달라고
사람이 하늘이란 말 되뇌면서
이슬 맑은 길 따라
혼자서 가고 있는
초로初老 한 사람 보입니다.
* 홍해리 시집 '치매행致梅行'(황금마루, 2015.)에서